모두가 ‘걸작'이라고 하는 책이나 영화 중에는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작품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잘 몰라서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또 어떤 이들은 ‘홍보가 과하다’며 조롱하기도 하죠. 저에게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러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아주 오래 전 대학로에서 두 명의 젊은 남성 배우가 연기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한 일이 있었는데요. 사실 그 당시에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두 배우는 (많은 대학로 소극장 공연이 그렇듯) 딱히 눈에 띄는 무대 장치도 없이 등을 맞대고 서서 건조한 표정과 목소리로 ‘고도를 기다리자’는 대사만 읊조렸습니다. 사실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가 ‘고도를 기다려야지’ 뿐이었어요. ‘왜 자꾸 고도를 기다린다는 거야’ 라며 씩씩거리고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신구와 박근형, 매일 밤 쏟아내는 노장들의 투혼
그렇게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봐야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해 말입니다. 배우가 ‘신구’, ‘박근형’, ‘김학철’, ‘박정자’…? 공연이 거의 5~6개월간 이어지는데 팔순을 훌쩍 넘은 노배우들을 원캐스트로 무대에 세우고, 게다가 ‘럭키’가 여성 배우라니 어떤 모습인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공연은 특별한 장치가 없습니다. 오로지 두 메인 캐릭터의 ‘랩’에 가까운 대화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작품입니다. 솔직한 말로 ‘다소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진행된 ‘고도를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서 배우 신구(선생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았어요. 원작이 있으니 작품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한때 TV만 켜면 나오던 배우들이 연기하는 ‘고도’는 어떤 모습일지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는 1953년 1월 파리의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된 아주 오래된 작품입니다. 작가인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소설을 쓰던 중 머리를 식히기 위해 4개월 여 만에 완성한 희곡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인데요. 쓸 때는 쉽게 썼지만 작품이 실제로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작품을 처음 접한 많은 사람들이 ‘So what(그래서 어쩌라고)?’ 이라고 말했고, 흥행은 커녕 의견이 갈리는 작품을 위해 용기를 낼 제작자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어려운 사람이 저 뿐만이 아니라니, 무척 다행이네요.) 1954년 연출가인 로즈 블린에 의해 겨우 막을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평가는 예상대로 엇갈렸습니다. 누군가는 ‘이게 무슨 연극이냐’며 혹평했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대작이 나타났다'며 열광했죠.
50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관람평…지루함과 심오함 그 어딘가
도대체 작품이 어느 정도길래 이렇게 말이 많은지,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에는 설치된 미술 장치가 가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뿐입니다. 작품은 단 이틀동안의 이야기일 뿐이고요. 배우는 5명이지만 전체 공연 시간 중 70% 가량은 고고(에스트라공)와 딘딘(블라디미르), 두 캐릭터의 쉴 새 없는 만담으로 이어집니다. 고고와 딘딘이 무대 밖으로 나가는 일은 두어 차례 뿐입니다. 둘은 계속 나무를 등지고 서서 무대 왼쪽에서 오른쪽 끝으로 이동하며 떠들어댑니다.
어떤 대화이길래 고령의 대배우들에게 ‘떠들어댄다’는 표현을 쓴 건지 한 번 볼까요.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아 아파하는 고고에게 딘딘은 “구두는 매일 벗어야 한다고 그랬잖아”라고 호통 칩니다. 그러면 고고는 “좀 거들어줘”라고 말하죠. 구두를 왜 오랫동안 벗지 않았는지 이유는 끝까지 나오지 않아요. 그저 두 사람은 ‘아프냐’,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와 같은 시시껄렁한 대화를 이어가며 티격태격합니다. 그러다 ‘가자’라고 말하는 고고에게 딘딘이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 라고 말하며 다음 (시시껄렁한) 대화로 넘어갑니다.
1막 중반부가 지나면 더 황당한 장면도 나옵니다. 길을 걷던 지주 ‘포조’와 노예 ‘럭키’를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처음에는 럭키와 자신의 처지가 다를 바 없다며 자조하고 불쌍히 여기던 두 사람은 점차 포조와 하나가 되어 럭키에게 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춤을 추라느니, 소리내서 생각을 하라느니… 그러자 럭키는 7분 가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철학적이고 어려운 단어를 연결한 긴 대사를 속사포 랩으로 쏟아냅니다.
사실 작품을 보고 돌아온 뒤 공연을 이미 본 지인들에게 관람평을 물어봤는데요. 평가는 50여 년 전처럼 지금도 여전히 엇갈렸습니다. ‘1막 내내 지루했다’, ‘럭키가 대사를 쏟아낼 때는 집에 가고 싶었다’는 극단적인 혹평이 있는가 하면 ‘인생 연극이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1막은 조금 지루했습니다. 대학 시절 젊은 배우들의 연기와 관록있는 대배우들의 연기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지만(차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 정도로) 막장 드라마와 숏폼에 익숙해진 저에게 자극도, 반전도 없는 두 배우의 끝없는 만담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고도는 ‘죽음’…하루를 성실하게 견딘 우리가 언젠가 만날 그것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를 두 번째 보고 나니 비로소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는 고도의 정체입니다. 고도(Godot)는 무엇일까요. 고도라는 단어가 신을 의미하는 영어와 프랑스어 God과 Dieu의 합성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하지만 베케트는 이같은 해석을 부정했다고 해요. 교도소에 수감자들은 이 연극을 보고 ‘고도는 곧 자유’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이 가장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자유’일테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고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네요. 그래서 저는 고도는 고도라고 생각합니다. 고도는 고도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혹은 열망하는 그 모든 것이 고도일 것입니다. 그 옛날 저에게 고도가 ‘무의미한 단어’였다면 저에게 고도를 끝없이 기다리는 두 사람의 행위가 무척 무의미해보였다는 뜻일 겁니다.
이번 공연에서 저는 고도가 ‘죽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품 속 대사처럼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올테고, 그 지루함(지루함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먹고, 자고, 사람을 만나고, 취미생활을 하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슬프거나 비극적인 결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올 죽음이라는 고도를 만났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를 성실하게 견뎌내고 극복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깨달음은 ‘연극이 오글거리는 자, 고개를 들어 배우를 보라’입니다. 연극을 처음 보는 분들은 ‘무대 앞에 앉아서 비현실적인 대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오글거린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 연극 뿐 아니라 뮤지컬, 콘서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일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 숫자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신구 배우는 수십 년의 연기 생활 동안 발을 만지는 연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요. 무대에서 천연덕스럽게 더러운 발을 긁적이는 모습은 언젠가 어머니가 보시던 평일 저녁 TV 드라마 속 그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발이 너무 더러워서 간지럽나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잘’ 긁적였거든요. 두 사람이 ‘한 번 안아보자’며 부둥켜 안는 모습은 어떻고요. 고고와 딘딘은 한 공연 당 3~4회 부둥켜 안는 연기를 하는데요. 작품이 막을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을 수많은 체온을 떠올리니 저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따뜻한 이들과 함께 발을 긁적이며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우리가 기다리는 그 고도를 만날 수 있겠죠. 신구 배우는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말했는데요. 아직 그들에게 인생을 다 배우지 못했기에, 배우들의 ‘다음 고도’도 볼 수 있기를 한 번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