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기업 원화 예금 잔액이 19년 만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금리와 경기 침체 여파로 대출 상환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부채를 줄이는 쪽을 택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현금성 자산을 줄이는 한편 장·단기 사채나 차입금 상환 등을 통해 부채비율을 낮춰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기업이 예금주인 원화 예금 잔액은 637조 5020억 원으로 1년 전보다 5조 8260억 원(0.9%) 감소했다. 한은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75년 이후 기업 예금 잔액이 감소한 것은 2004년과 지난해 단 두 차례뿐일 정도로 이례적인 상황이다.
기업들은 요구불예금과 저축성예금에서 동시에 돈을 뺀 것으로 확인됐다. 요구불예금은 보통예금과 당좌예금 등을, 저축성예금은 정기예금·정기적금·저축예금·기업자유예금 등을 각각 포함한다. 지난해 말 기업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115조 610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1조 2280억 원(1.1%)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저축성예금 잔액도 522조 4410억 원으로 4조 5980억 원(0.9%) 줄었다.
개별 주요 기업들도 비슷한 자금 흐름을 보이고 있다. 국내 매출액 10대 기업 중 지난해 3분기 기준 재무활동현금흐름이 직전 연도인 2022년 말 대비 순유출로 전환하거나 순유출 규모가 더욱 커진 곳은 기아(000270)차(-3조 4544억 원→-5조 1423억 원), 현대모비스(012330)(-6385억 원→-1조 6609억 원), 포스코인터내셔널(047050)(9788억 원→-8709억 원), 삼성물산(028260)(2조 5608억 원→-1조 1483억 원) 등 4곳이다. 삼성전자(005930)(-1조 9390억 원→-8718억 원) 역시 규모는 줄었지만 지난해에 이어 순유출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 기업이 빚을 갚기 위해 장·단기 차입금이나 사채 상환에 나서면서 현금의 순유출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이들 기업 10곳 중 7곳의 부채비율 역시 1년 전과 비교해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국내 기업들은 최근 자금을 조달할 때 금융권 차입보다 내부 유보금 활용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매출액 1000대 제조 기업 중 30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절반 이상인 63%가 자금을 조달하는 주요 수단으로 ‘내부 유보 자금’을 꼽았다. ‘금융권 차입’은 33.7%, ‘회사채·주식 발행 등 직접금융시장’은 2.3%에 불과했다. 앞선 2022년 8월 조사에서 주요 자금 조달 수단으로 48.2%가 금융권 차입을 꼽아 내부 유보 자금(27.9%)을 웃돈 것과는 차이가 있다.
또 은행으로부터 차입한 고금리 대출에 대해 현재 이자나 원금을 상환하고 있다고 답한 기업은 전체의 53.3%였다. 자금 조달·운용상 주요 애로 사항에 관한 답변에서도 ‘고금리에 따른 금융비용 증가(69.3%)’가 가장 많았다. 이어 ‘운영상 자금 수요 증가(25%)’ ‘은행의 대출 심사 강화(22.7%)’ ‘만기 도래 상환 부담(10%)’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