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귤 등 과일 값 폭등세가 이어지면서 올 들어 2%대로 내려왔던 소비자물가가 다시 3%를 넘어섰다. 정부는 오렌지와 바나나 수입을 확대하고 할인 지원에 600억 원을 추가 투입해 물가를 잡겠다는 입장이지만 국제유가가 꿈틀대고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통계청은 설 연휴가 끼어 있던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3.1% 상승했다고 6일 밝혔다.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11월(3.3%)과 12월(3.2%) 3%를 웃돌다가 올 1월(2.8%)에는 2%대로 내려왔다. 하지만 한 달 만에 상승률이 3%를 넘게 됐다.
물가 급등의 원인은 신선과실이다. 신선과실은 전년 대비 41.2%나 올랐다. 1991년 9월(43.9%) 이후 32년 5개월 만의 최대 폭이다. 품목별로 보면 △귤 78.1% △사과 71.0% △배 61.1% △토마토 56.3% △딸기 23.3% 등이다. 과일·채소류가 반영되는 신선식품지수 상승률도 20%를 기록해 2020년 9월(20.2%)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공공서비스 물가도 10% 넘게 뛰었다. 시내버스요금이 11.7% 올라 11년여 만의 가장 큰 상승 폭을 보였다. 택시요금도 13.0% 급등했다. 지역난방비(12.1%)와 도시가스(5.6%), 전기요금(4.3%) 등 역시 들썩였다.
경유·휘발유 등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1.5% 하락했다. 그러나 최근의 국제유가 오름세에 전월 대비로는 2.5% 상승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등 주요국의 경제 회복세로 수요는 늘어나는데 중동 분쟁은 이어지고 있어 유가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물가 불안이 길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기로 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의 물가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2%대 물가가 조속히 안착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마땅한 카드없이 돈풀기만 지속…유가마저 뛰면 속수무책
물가상승률이 다시 3%대를 넘어선 것은 1차로 농산물 가격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과·귤 값은 1년 전보다 70% 이상 올랐다. 이 가운데 중동 정세 불안 등의 영향으로 국제유가도 강세를 이어가고 있어 향후 물가가 추가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다.
6일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3.1%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8월 이후 계속 3%대를 보이다 1월 잠시 2.8%로 내려왔는데 한 달 만에 3%를 웃돌게 됐다.
신선과실이 41.2%나 오르며 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농산물도 1년 전보다 20.9% 치솟아 13년 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지난달 물가상승률 3.1% 가운데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기여도가 1%포인트에 달한다. 이 같은 상황은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이상기후 탓에 농산물·채소가 원활히 출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은 “귤의 경우 노지 출하량이 감소한 데다 과일 수요가 많아 가격이 높게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농산물 가격이 고공 행진하면서 서민들의 장바구니 사정도 나빠지고 있다. 소비자들이 자주 구매하는 품목으로 구성된 생활물가지수는 3.7% 올라 4개월 만에 상승 폭이 커졌다. 교통요금도 오르고 있다. 시내버스료는 11.7% 올라 2012년 6월(11.8%) 이후 11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전기·가스·수도 요금도 4.9% 올랐다.
물가 둔화 흐름을 이끈 유가마저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석유류 물가 하락 폭은 1.5%에 그쳐 지난해 12월(-5.4%)과 올해 1월(-5.0%)보다 약해졌다. 수입 원유의 약 70%를 차지하는 두바이유 가격이 지난해 12월 배럴당 평균 77.2달러에서 1월 78.9달러, 지난달 81.2달러로 단계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두바이유가 배럴당 82~84달러 사이에서 거래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다음 달 발표될 3월 물가 동향에서 석유류 가격이 플러스로 전환해 전체 물가를 밀어 올릴 가능성도 거론된다. 씨티그룹은 향후 1년 6개월 내에 유가가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본다. 원유 최대 소비국인 중국의 경기 둔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이 감산을 연장한 데다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에서 촉발된 중동 정세 불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날 물가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 예산 600억 원 투입 △오렌지·바나나 직수입 확대 △만다린·두리안 및 파인애플 주스 관세 인하 등의 추가 물가 안정책을 내놓았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석유류의 경우 불법·편승 인상이 없도록 매주 전국 주유소를 점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미 정부에서 관세 인하와 슈링크플레이션(가격을 유지한 채 제품 용량을 줄이는 것) 단속, 유류세 인하 조치 연장 등 동원할 수 있는 카드를 거의 소진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시점에서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물가 안정 카드가 많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유류세 인하 조치의 경우 2021년 11월부터 이어지고 있어 정책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짚었다.
과일 값만 해도 햇사과가 나오는 7월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천수답식 대책인 셈이다. 수입 과일 관세 인하만 해도 과일 가격 전반을 안정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어서 추가적인 공급 확대가 얼마나 효과를 낼지도 미지수다. 김형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햇사과가 나올 때까지는 가격이 높게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데도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돈 풀기를 지속하면서 물가를 자극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발표된 중견기업·첨단산업 저리 대출을 골자로 한 총 76조 원 규모의 대출 지원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물가 수준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반기에 65%의 재정을 조기 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한은은 1월 시중은행을 통해 중소기업 대출을 간접 지원해주는 금융중개지원대출을 9조 원 규모로 운용한다고 밝힌 데 이어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를 더 확대할 가능성까지 내비친 바 있다. 이미 지난해 12월 광의통화량(M2, 평잔 기준)이 3916조 6854억 원으로 1년 새 116조 원 넘게 불어났다. 석 교수는 “경기 둔화가 대비되는 하반기에 대비해 실탄을 쌓아야 하는데 오히려 정책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