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 정책의 시대가 됐습니다. 통상 정책조차도 산업 정책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운영되는 세계사적인 대전환기에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일본·유럽연합(EU) 등 글로벌 경제 전쟁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해외 공관 주재 상무관들이 글로벌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나고 보호무역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정책의 시대가 부활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보조금 지급을 꺼리는 EU마저 보조금 전쟁에 뛰어들 정도로 세계경제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열 주미국대사관 상무관은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경제신문 본사에서 열린 긴급 좌담회에서 “미국이 자유무역과 같은 전통적인 세계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 속에서 자국 내 제조업의 쇠락, 중국의 부상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보호무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산업 정책의 시대가 도래했다”며 “통상 정책이 산업 정책을 뒷받침하는 현재의 기조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EU도 마찬가지다. 최세나 주벨기에EU대사관 상무관도 “현 EU 집행위원회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존에 전권을 가진 통상 정책, 경쟁 정책뿐만 아니라 탄소국경조정제도와 핵심원자재법·탄소중립산업법 등 산업 규제 법안을 많이 내놓는 변화가 있었다”며 “올 6월 EU 의회 선거와 연말 집행위원장 선출 이후에도 산업 정책 위주의 기조와 보호주의적 통상 정책 성향은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 상무관은 “EU가 공급망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을 의식한 듯 반도체를 필두로 회원국의 보조금 승인을 완화적으로 하고 EU 차원의 펀드로 지원하는 등 굉장히 유연해졌다”고 짚었다.
일본은 더 적극적이다. 서가람 주일본대사관 상무관은 “일본이 TSMC 유치를 위해 4700억 엔(약 4조 1700억 원)이라는 전례 없는 현금 지원을 했는데 경제산업성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원했다”면서 “재무성이 상당히 반대했지만 산업을 잘 아는 의원들이 재무성을 압박해 지원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본의 재무성은 예산과 세제, 외환 등을 담당하는 부처로 한국의 기획재정부와 역할이 비슷하다. 경제산업성은 산업통상자원부와 비교되는 곳이다. 한국과 일본은 전통적으로 경제 부처에서 기재부와 재무성의 입김이 센데, 일본의 경우 반도체 보조금만큼은 경제산업성의 논리가 먹혀들었다는 뜻이다. 서 상무관은 “일본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TSMC가 외국 기업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공급망 확보 차원을 고려하면 보조금을 줘도 괜찮다는 생각이었고 보조금 자체가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또 ‘전략 분야 국내 생산 촉진 세제’를 신설하고 생산량과 연동해 법인세를 감면하는 제도를 다음 달 1일부터 시행한다. 기업이 마이크로컨트롤러용 25~45㎚(나노미터·10억분의 1m) 제품 생산 시 200㎜ 웨이퍼 기준 장당 1만 6000엔, 45~65나노 제품의 경우 1만 3000엔을 지원받는다. 서 상무관은 “일본 기업의 원가 경쟁력이 제고돼 기업 이윤에 영향이 있을 듯하다”며 “우리도 벤치마킹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추격도 매섭다. 이재근 주중국대사관 상무관은 “중국은 2025년까지 핵심 산업에서 소재 부품 등 자급률을 7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라며 “최근 양회를 통해 연구개발(R&D) 예산을 10%나 늘렸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누가 당선되더라도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제조 역량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 상무관은 “미국이 지향하는 방향은 자국 내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라며 “‘반도체지원법’은 민주·공화 양당이 한뜻으로 통과시킨 법”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친환경차 보급 확대 방안을 담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서는 “(도널드 트럼프냐 조 바이든이냐에 따라) 결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지원법과 IRA를 따로 떼어 놓고 봐야 한다는 취지다.
한국의 길은 앞으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가인 미국과 EU 등이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김 상무관은 “(한국은) 역사적인 한미 동맹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활용해 세계 최대 경제 규모의 소비 시장에서 세일즈해야 한다”면서 “공급망도 연결해 앞으로 닥칠 수 있는 여러 리스크에 두 나라가 협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 상무관은 “EU 역시 한국처럼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당장 (EU의 공급망에 편입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EU와 손을 잡고 있어야 미국과 협상 시 지렛대가 생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