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일 대국민 담화에서 “2000명 의대 증원에 대한 합리적인 통일안을 제시해달라”며 의정(醫政) 갈등을 풀어낼 대화의 공을 의료계로 넘겼다. 하지만 의료계는 시종일관 “2000명 증원 철회 없이 대화는 없다”며 기존의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숫자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라고 유연한 입장을 밝혔음에도 대한의사협회, 의대 교수, 전공의들이 모두 각각의 목소리만 내고 있어 대화 협의체 구성까지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의정 갈등 장기화에 응급실 상황은 악화되고 중증 질환 진료마저 차질을 빚는 등 환자와 의료진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2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정부가 의료계에 통일된 의사 결정과 대표성을 갖추고 협상에 나와달라고 공식 요청한 지 37일이 지났다. 하지만 의료계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2월 26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의료계 전체 의견을 대표할 수 있도록 대표성을 갖춰서 대화 테이블에 나오면 훨씬 효율적인 대화가 될 것”이라며 의대 정원 이슈를 포함해 전공의 집단행동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대표성 있는 구성원을 모아달라고 의료계에 공식 제안했다.
문제는 대표성을 갖춰 대화 테이블에 앉아달라는 정부의 요청과는 달리 의료계 내부의 이해관계가 달라 통일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 사태 초기인 2월 23~24일 성균관대 의대 교수협의회가 소속 교수 2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증원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고 24.9%(50명)가 ‘500명 수준 증원’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40개 의대 학장 단체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의회(KAMC)가 총회를 열고 의대 증원 규모로 350명을 제시했다. 이처럼 일부 교수들은 의대 증원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원의 중심인 의협이 “우리가 의료법상 유일한 법정 단체”라고 대표성을 내세우며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낸 후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며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의료계 내부 온건파들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전공의들로 이뤄진 대한전공의협의회 역시 일부 인사가 의협 비상대책위원회에 소속돼 있지만 핵심 이슈인 전공의들의 근무 여건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의협의 투쟁 일변도 대응에 편승해 사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의료계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이 제시한 과학적인 의사 증원안을 의료계가 내놓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00명 증원 철회가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강경파들의 목소리만 득세한 상황에서 제각각인 의료계 내부의 목소리가 통일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이달 1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에 따르면 3개월 내 (의대 증원안) 관련 결론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한다”며 ‘범사회적 의료개혁협의체’를 통한 의대 증원안 재논의를 촉구했지만 ‘증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날 경우 왜곡된 조사 결과라며 ‘수용 불가’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전병왕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집단행동을 하면서 과학적 근거와 논리 없이 주장만 반복하는 방식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며 정부의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27년 만에 의대 증원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방식의 의료계 설득이 필요했지만 면허취소라는 행정처분 등 강경 대응을 앞세우며 전공의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만 명에 달하는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떠나 전국 곳곳에서 환자들의 불편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공의 대표들에게 여러 차례 대화를 제안하고 연락 시도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는 말만 7주째 반복하고 있다.
한편 대통령실은 이날 “대통령실은 국민들에게 늘 열려 있다”며 “윤 대통령은 집단행동 당사자인 전공의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과 전공의들 간 대화의 장이 열릴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