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부터 올림픽 금메달이 터지기 시작한 한국 펜싱은 이번 파리 올림픽을 통해 효자 종목 지위를 ‘넘치게’ 굳혔다. 과거 한발 더 내딛는 민첩한 ‘발펜싱’으로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해온 한국 펜싱은 그에 더해 대등한 체격과 앞선 체력, 그리고 자부심까지 갖춰 이른바 ‘뉴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 시대를 열었다.
오상욱(28·대전시청)·구본길(35·국민체육진흥공단)·도경동(25·국군체육부)·박상원(24·대전시청)이 나선 남자 사브르(머리·양팔 포함 상체만 공격 가능) 대표팀은 1일(한국 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페메르 경기장에서 끝난 파리 올림픽 단체전 결승에서 헝가리를 45대41로 꺾고 대회 3연패 역사를 썼다. 2012년 런던부터 12년간(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는 종목 로테이션으로 미개최) 정상이다.
◇GOAT로 올라선 오상욱, 전설 된 구본길=3년 전 도쿄에서 올림픽 2연패를 이룰 당시 막내였던 오상욱은 누구도 이견을 달기 힘든 한국 펜싱의 ‘GOAT(Greatest Of All Time·역사상 최고 선수)’로 올라섰다. 개인·단체전 석권으로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2관왕에 올랐는데 올림픽 2관왕은 세계 펜싱 남자 사브르에서 24년 만에 나온 기록이기도 하다. 도경동은 “우리는 오상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오상욱은 “어펜저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고치면서 김정환·김준호(이상 은퇴)가 빠지고 도경동·박상원이 합류한 이번 대표팀에 대해 “뉴 어펜저스는 좀 더 힘차고 패기 넘친다. 쓰나미 같은 힘이 있다”고 했다.
쓰나미 같은 힘은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다. 대한체육회는 국가대표스포츠과학지원센터를 통해 시기별로 다른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피스트를 활용한 28m 왕복 달리기로 체력을 끌어올렸고 올림픽을 두 달여 남기고는 다양한 풋워크 훈련과 시지각 반응 훈련으로 디테일을 잡았다. 선수별 결과를 데이터화해 피드백을 교환했고 운동만큼 회복도 중요해 고산소 및 냉각 압박 회복 처치가 들어갔다. 훈련이나 대회 때마다 근육 온도 상승-관절 이완-유연성-근신경계 활성으로 이어지는 꼼꼼한 웜업 프로그램이 적용됐다.
마지막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개로 늘리며 전설이 된 구본길은 곧 둘째 아들을 얻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목표는 이제 나고야(2026년 아시안게임)”라고 말할 만큼 체력과 기술에 자신이 있다.
◇뉴페이스의 미친 존재감=오상욱은 “대회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구본길·오상욱·박상원·도경동이라는 각자의 브랜드가 있다. 자부심을 가지고 임하자’고 했다”고 돌아봤다. 구본길은 “선후배 관계가 아닌 동등한 선수 사이임을 강조했다”고 했다. 선배들의 이런 리드 때문일까. 올림픽이 처음인 도경동과 박상원은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으로 금메달의 당당한 주연 역할을 했다.
도경동은 30대29로 쫓긴 결승 7라운드 시작과 함께 구본길을 대신해 투입됐다. 8강과 4강을 뛰지 않은 후보 선수였는데 들어가자마자 ‘폭풍 5득점’에 성공해 점수 차를 6점으로 벌리며 승기를 가져왔다. 2012년 런던 대회 단체전 금메달 멤버인 원우영 코치는 “(도)경동이가 나가면서 손가락을 딱 뻗어 본인을 믿으라고 하더라. 그때 ‘오케이, 됐어’라고 느꼈다”고 했다. 박상원은 첫 라운드에 상대 간판 아론 실라지에 5대4로 앞서며 첫 단추를 잘 끼워줬다.
◇SK텔레콤, 20년간 300억 원 후원=양궁에 현대자동차가 있다면 펜싱의 든든한 배경은 SK텔레콤이다. 2003년부터 대한펜싱협회 회장사를 맡은 SK텔레콤은 누적 지원 금액만 3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해 한두 개 국제그랑프리를 직접 개최해 실전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도쿄 올림픽 직후 일찌감치 파리를 겨냥해 매년 예산을 늘렸다. 진천선수촌에 올림픽 경기장 규격에 맞춘 피스트를 설치하는가 하면 파리 현지 지원 캠프도 차렸다.
홈 이점을 안은 프랑스와의 4강 승리가 결정적이었다고 돌아본 오상욱은 “박수와 응원이 스피커를 통해 엄청 크게 들리도록 해 소음을 견디는 훈련을 했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대표팀은 외부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불리한 판정을 설정해놓는 모의 훈련까지 하며 수성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