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 웨스트. 400여개에 달하는 스타트업 부스와 몰려드는 인파는 여느 테크 콘퍼런스와 다를 바 없지만 곳곳에서 펼쳐지는 스타트업 ‘피칭(투자설명회)’이 실리콘밸리다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단 6분의 피칭 시간이 허락된 스타트업 대표들은 사업 아이템과 방향을 설명하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벤처캐피탈(VC) 심사역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아내야 했다.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콘퍼런스 ‘테크크런치 디스럽트 2024’. 실리콘밸리 유수의 VC 앞에서 펼쳐지는 글로벌 스타트업의 경연장이다.
무대의 공식 명칭은 ‘스타트업 배틀필드 200’다. 행사에 공식 초대 받은 200개 스타트업 중에서 단 한 곳, 최후의 승자에게 10만 달러의 상금과 투자 유치 기회가 주어진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피칭 경쟁이 행사 기간 내내 펼쳐져 ‘스타트업 월드시리즈’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다. 지난 14년간 1300여 개의 스타트업을 발굴해 드롭박스 등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을 배출한 ‘스타트업 배틀필드’는 여타 다른 콘퍼런스와의 차별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세계 최대 테크쇼로 불리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를 비롯해 대형 테크 전시회는 수도 없이 많지만 스타트업 경연장으로서 존재감만큼은 압도적이다. 실제 테크크런치 디스럽트 참가사와 참가자는 지난해 기준 각각 355개, 1만3000여 명으로 CES 2024의 4300여 개, 13만5000명에 비하면 초라한 규모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VC 관계자들은 CES보다 테크크런치 디스럽트를 선호한다고 입을 모은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스타트업의, 스타트업에 의한, 스타트업을 위한 행사인 만큼 ‘원석’을 만날 확률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CES 2024를 찾지 않았던 한 실리콘밸리 VC 심사역은 이날 행사장에서 기자를 만나 “CES는 태생이 스타트업 전시회가 아닌 데다 규모가 갈수록 비대해져 잡음이 커졌다”며 “트렌드에 민감하고 빠른 의사 결정이 중요한 실리콘밸리 환경에는 테크크런치 디스럽트 같은 행사가 좀더 적당하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VC의 선택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입소문’ 덕에 테크크런치 디스럽트를 찾는 우리 스타트업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다. 올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와 한국정보기술연구원(KITRI) 등과 함께 통합 한국관에 자리잡은 국내 스타트업은 총 24개사로 지난해 15개사에서 9곳이 늘었다. 일본 등 5개국이 운영하는 국가관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인기를 반영하듯 AI 가속기 설계사 ‘딥엑스’, 위성 기반 지상 탐지 AI 서비스를 개발하는 ‘다비오’, AI 모델 압축과 최적화를 제공하는 ‘클리카’ 등이 주목을 받은 가운데 모빌리티, 보안, 바이오헬스 기업들도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코트라 실리콘밸리 무역관 관계자는 “AI와 제조업 융합 트렌드를 반영하듯 전략 투자를 노리는 기업벤처캐피탈(CVC) 방문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귀띔했다.
참가사 중 17곳은 이틀에 걸쳐 피칭 무대에 올라 투자 유치에 나선다. 29일에는 메타·엔비디아·소프트뱅크 등 빅테크와 현지 VC 관계자 150여 명과 네트워크 리셉션을 통해 투자 유치 기회를 모색할 계획이다. 박성호 코트라 북미지역본부장은 “미국 현지 테크기업, 투자자들의 혁신 기술에 대한 수요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변화 속도 또한 빠른 시점에서 한국 스타트업들이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