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학생들 원고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는 부천 원미동 ‘박 씨 아줌마’의 정체는

■ 부천 ‘수다쟁이 다락방’ 박창수 작가

소설가 꿈꾸다 기자로, 14년 전부터 글쓰기 교육 시작

수업에는 10년 넘는 학생 수두룩…등단도 10여 명

“학생들 원고가 내 삶의 스승…글 통해 변화 목격 보람”


행운이 찾아왔다. 노인복지관의 신규 사업인 ‘냉장고를 부탁해’ 이벤트에 선정된 것이다. (중략) 사위가 장인을 위해 보낸 아사이베리와 블루베리는 아직도 추위로 꽁꽁 얼어 떨고 있다.

<냉장고냐? 냉 창고냐?> 中, 김순자



“블루베리를 추위로 꽁꽁 얼어 떨고 있다고 표현한 부분이 좋아요.”

“'냉장고냐, 냉 창고냐'라는 제목도 맘에 들어요.”

라이프점프는 지난 5일 경기 부천시 원미2동행정복지센터의 한 회의실을 찾았다. 올해로 14년 차인 글쓰기 수업 ‘수다쟁이 다락방’이 열리는 이곳에서는 수필 발표와 피드백이 한창이었다.

회비가 5000원만 더 저렴해도 옆 동의 수업으로 갈아타고, 변하는 사회 트렌드마다 수업 수요도 바뀌는 상황에서 동네 행정복지센터의 수업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건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하지만 수다쟁이 다락방은 다르다. 2011년부터 이어진 글쓰기 수업에는 100여 명이 참석했다.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한 이도 10명이 넘는다. 그 중심에는 원미2동에서 ‘박 씨 아줌마’로 불리는 박창수(60) 작가가 있다.

경기 부천시 원미2동의 글쓰기 수업 ‘수다쟁이 다락방’을 진행하고 있는 박창수(60) 작가. 정예지 기자경기 부천시 원미2동의 글쓰기 수업 ‘수다쟁이 다락방’을 진행하고 있는 박창수(60) 작가. 정예지 기자




“저는 보고 들은 걸 글로 풀어야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채워지면 글로 비우고, 채우고 또 비우고…비우고 나면 개운하게 멍해지는 그 기분이 좋았죠. 어릴 때부터 늘 그랬어요.”

글쓰기에 늘 관심이 많던 박 작가는 소설가를 꿈꿨다. 하지만 취업 전선에 나선 27살, 배고픈 소설가의 길 대신 기자를 택했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사심을 품었다. 1991년 막내 기자 시절, 동경하던 한승원 작가를 만나고 싶어 일부러 취재를 요청해 인터뷰했을 정도다.



“제가 기자 생활하던 때는 아침 회의 시간에 원고지가 선배들 얼굴로 날아들고 그랬죠.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신문사, 잡지사 등에 다녔달까요. 커피 심부름하며 글쓰기를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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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독립해 프리랜서 작가이자 기자로 지내던 그는 2011년 봄, 부천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출판물 제작에 참여하며 부천시와 연이 닿았다. 당시 김현규 부천시 원미2동 동장이 마을신문 <원미마루> 창간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자 양성 교육을 시작했다. 2011년 10월에는 수다쟁이 다락방의 시초인 글쓰기 수업도 덩달아 열리게 됐다.

이후 2012년 글쓰기 수업 학생들의 공동 수필 <글로 푸는 원미동 사람들> 출간을 시작으로 코로나19가 발발하고 종식된 2020~202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회원들의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했다. 올해 10월 <내 얘기 좀 들어볼래요?>까지 총 8권의 공동 수필집이 세상에 나왔다. 그는 2017년에는 지역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천시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수다쟁이 다락방’에서 다른 회원의 글을 읽고 있는 중장년. 정예지 기자‘수다쟁이 다락방’에서 다른 회원의 글을 읽고 있는 중장년. 정예지 기자


“제 수업에는 85세 학생도 계세요. 처음에는 인생 선배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게 부담되기도 했죠. 그런데 점차 아이들보다 중장년을 가르치는 게 더 기쁨이 되더군요. 이분들은 학점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둔 글쓰기가 아니라 오로지 글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분들이에요.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변화하는 걸 보면 보람되죠.”

요양보호사인 이양순(64) 씨는 2013년부터 수업에 나오기 시작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돌봤던 것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됐다. 글을 배우자 현장에서 겪고 본 것을 기록하고픈 욕망이 들끓었다. 이 씨는 2018년 국가보훈처가 진행하는 ‘22회 전국문예대전’에서 수필부문 장려상을 받고 2019년에는 ‘제16회 부천신인 문학상’ 수필부문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여러 공모전에서 입선했고, 올해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목격한 것들을 르포로 쓴 ‘나는 행복한 요양보호사입니다’를 출간했다.

수업이 개설된 2011년부터 함께한 김연순(63) 씨도 이 수업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고 하잖아요. 제게는 박 작가님이 그런 분이에요.”

김 씨는 외부 활동을 금하는 보수적인 남편에게 “산책하러 간다”고 둘러대며 수업에 참석해 글을 써야만 했다. 이랬던 김 씨가 수업을 통해 2013년 ‘제2회 부천시 시가활짝 우수상’, 2015년 ‘제30회 경기여성기·예경진대회 시부문 우수상’을 받고 2018년에는 문학청춘을 통해 시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하자 김 씨의 남편도 생각을 바꿨다. 이제는 누구보다 김 씨를 응원해 주는 지지자가 됐다.

경기 부천시 원미2동의 글쓰기 수업 ‘수다쟁이 다락방’ 수업 현장. 중장년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피드백하고 있다. 정예지 기자경기 부천시 원미2동의 글쓰기 수업 ‘수다쟁이 다락방’ 수업 현장. 중장년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피드백하고 있다. 정예지 기자


수다쟁이 다락방은 수업 등록 10년 차가 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학생들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수업이 지속되고, 매년 출간까지 할 수 있는 건 자투리 시간을 내 학생들의 글을 꼼꼼히 첨삭하고, 배움을 갈망하는 학생은 방송통신대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돕고,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밥을 먹일 정도로 글쓰기 수업에 마음을 다하는 박 작가의 덕이 크다고 입 모아 말한다. ‘박 씨 아줌마’로 불리는 것도 학생들을 모두 알뜰살뜰 챙기기로 유명한 탓이다. 하지만 박 작가는 모두 열심히 임하는 수강생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학생들 원고를 보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요. 언젠가는 제 소설을 완성하고 싶은데 정작 제 책은 40매 정도 썼을까요? 내년에는 꼭 제 책을 써야죠. 그래도 좋아요. 학생들 원고가 제 삶의 스승이거든요.”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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