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시절 각종 대회에서 트로피를 수집하고 국가대표도 지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지한솔. 대형 기대주로 주목 받으며 올라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도 지한솔은 샷이면 샷, 퍼트면 퍼트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는 기량으로 강자 이미지를 굳혔다.
그런 지한솔은 올해 10월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에서 우승한 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투어 10년 차의 막바지를 보내는 중견인데 각고의 노력 끝에 첫 우승을 해낸 신예 같아 보였다.
시즌 시작과 함께 찾아온 갑상샘 항진증이라는 병과 힘겹게 싸워온 지한솔이다. 지난해는 든든한 산 같던 아버지를 여의는 일도 있었다. 통산 3승과 4승 사이의 2년 2개월, 그리고 지난 10년의 일들이 지나가 지한솔은 눈물 지었다. 다음 10년은 쉬울지 모른다는 기대를 지한솔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하지도 않는다. 힘들었던 시기에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가족과 동료들이 있고 무엇보다 몇 겹은 더 단단해진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우승 뒤 받은 축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나?
“일반 골프팬과 동료 선수들로부터 정말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감동했다는 메시지도 많이 받아서 감사했다.”
오빠(투어 프로 출신 지수진)는 어떤 말을 해주던가?
“그냥 ‘잘했다’ 이 세 글자. 2라운드 끝나는 순간부터 우승을 점찍어 놨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계속 ‘하던 대로 계속해’란 말을 들었다. ‘너무 부담스럽다. 알아서 할게’ 했다.”
과거 오빠에게 캐디를 맡기기도 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주니어 선수와 일반 아마추어 골퍼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제 스윙 코치다. 오빠한테 완전히 맡긴 게 벌써 5~6년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오빠랑 서로 조언도 많이 해주고 쭉 같이 왔다. 내 스윙을 누구보다 잘 안다.”
3라운드 경기 뒤 “우승은 내 거라고 느낀다”고 했다. “이번엔 다르다”고도 했고. 그 근거는 무엇이었나?
“88CC에서 잘 친 기억이 한 번 있다. 7언더파를 쳤었다. 근데 그런 걸 떠나서 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았다. 그린에 내리막 경사가 많고 심한 곳이라 항상 위험 변수가 큰 코스다. 그래서 처음엔 기대를 많이 한 건 아니었다. 집(화성 동탄)에서 다니기 좋아서 편한 마음으로 임했는데 스타트가 좋았고 2라운드까지도 좋았다. 그래서 편안함에서 오는 기대감이 생겼다. ‘괜찮겠다’ ‘잘하면 우승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직전 대회에 (PGA 투어 뛰는) 김시우 프로님이 응원도 와주고 해서 어깨 ‘뽕’이 이만큼 들어가 있기도 했고. 마지막 날 (친한) (박)주영 언니랑 같이 친 것도 좋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오지현 선수와 친해서 그의 남편인 김시우 선수와도 친분이 생긴 건가?
“맞다. 올 5월에 미국에 가서 같이 만난 뒤로 더 친해졌다. 조카(김시우 부부의 아들)까지 현장 응원을 와주니 정말 응원이 많이 됐다.”
마지막 홀 퍼트 때 흰 나비가 나타났다고. 어떤 상황이었나?
“최종일에 기상 예보로 확인한 바로는 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2타 차로 티샷을 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라. 저는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분(지난해 2월 여읜 아버지)이 계시니까 기쁨의 눈물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린에 올라가 버디 퍼트를 하려고 어드레스를 서고 깃대 쪽을 곁눈질로 바라보는데 나비가 똑바로 날아오더라. 어드레스를 풀어야 하나 하다가 그냥 쳤는데 나비가 제 곁을 쓱 지나갔다. 아버지였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지켜봤던 분들도 끝나고 아버지였을 거란 말을 해주셨다.”
마지막 날 입은 초록 계열의 상의는 2주 전 대회 때 입은 것과 같은 옷으로 보이던데 맞나?
“맞다. 의류 후원사로부터 봄에 받은 건데 그렇게 ‘쨍한’ 초록색 옷은 한 번도 입어본 적 없고 해서 그동안은 입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동부건설 대회 때 처음 입었다. 동부건설은 제 메인 스폰서 회사인데 마침 상징색이 초록이어서 마지막 날 강렬하게 한 번 입어봐야겠다 해서 입었다. 그랬는데 이글도 하고 좋은 성적이 나온 거다. 이후 세탁을 맡겼고 서울경제 대회 2라운드 끝나고 왠지 모르게 그 옷이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집에 돌아가면서 옷을 찾아갔고 마지막 날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서 입었다. 결과적으로 행운을 가져다준 셈이 됐다.”
몸이 제일 힘들었던 땐 언제인가. 그래서 시즌을 접어야 하나 가장 크게 고민하던 때는 언제였는지.
“올 시즌 첫 대회부터 많이 힘들었다. 전신 떨림 증상이 심했다. 어드레스 들어가서도 계속 몸이 떨려서 치는 타이밍을 못 잡았다. 경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야 했고. 병원에서 처방을 받은 뒤로는 약 때문에 또 힘들었다. 정신이 몽롱해 감각적인 부분이 무뎌졌다. 투어에 메디컬 익스텐션(병가)을 낼 수 있는 기한이 5월 대회까지였는데 그때 시즌을 중단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3연속 컷 탈락도 두 번 있었고 성적으로는 희망을 가질 여지가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대회를 뛰었다. 좀 쉬고 나오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계속 달린 이유는?
“5월에 저희 엄마가 방신실 선수 부모님에게 조언을 구했다.(투어 2년 차 방신실도 과거 갑상샘 항진증으로 고생했다.) 바로 피드백이 왔다. 이럴 땐 이렇게 대응하면 되고 저럴 땐 또 어떻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세세하게. 그렇게 도움을 받으니까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서더라. ‘일단 해보자’ ‘일단 해보는 거다’ 하는. 대회 나가도 어차피 또 컷 탈락인 건 누구보다 잘 아는 상황이었다. 컷을 통과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그냥 대회 나가면서 쉬자고 생각했다. 감은 살아있어야 하니까.”
우승 후 방신실 선수와 그 부모님을 만났을 텐데.
“바로 다음 대회에서 만났고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주시고 좋아해주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신예인 방신실 선수랑은 사실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아, 저 선수가 방신실이구나’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같은 조로 경기한 것도 올해 가을이 처음이었고. 그런데도 크나큰 도움을 준 거다.”
방 선수 말고도 투어의 동료들한테 특히 감사함이 큰 것 같은 모습이다.
“저는 뭐랄까 그냥 ‘마이웨이’로 연습 그린에서 조용히 내 것만 하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다가오는 사람은 마다 않고 반갑게 인사하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 그런데도 선수들은 저를 정말 많이 챙겨줬다. 힘들 땐 힘내라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따뜻한 격려로 대해주고. 작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큰 위로가 됐다. (비시즌 훈련 등 활동으로 바쁜) 2월이라 장례식장에 올 수 있는 선수도 많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선수들이 찾아와서 곁에 있어줬다.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작년에 우승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공개적으로 전하고 싶었는데 우승이 좀 늦어졌다. 올해 몸이 아픈 일을 계기로 동료들이랑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현재 식단이나 운동 등 생활 습관은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나?
“그저 잘 먹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식단 관리다. 방신실 부모님이 추천해준 건강 음료를 꾸준히 먹고 있고 보약도 먹는다. 운동은 아무래도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저는 피트니스 센터에 출근 도장을 찍는 스타일이었다. 운동을 많이 하는 선수 축에 들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한다. 대신 체육관에서 저한테 알맞은 맞춤 운동을 만들어서 트레이너들이 옆에서 같이 동참해주신다. 복근 운동이 좀 많다. 샷 연습도 원래 좀 많이 하는 편인데 스타일이 바뀌었다. 적게 하고 감이 온다 하면 거기서 딱 내려놓고 쉰다. 새로운 운동법과 연습법에 익숙해지고 있다.”
주니어 시절 얘길 좀 해보자. 고2 때인 2013년에 익성배아마추어선수권에서 2위 이소영을 10타 차로 제치고 우승한 게 아직도 회자한다. 이것 말고도 이력이 화려할 텐데 새삼 소개를 좀 해보자면?
“고2 때 MBC 대회, KB금융 대회 우승이 있었고 고3 땐 중고연맹 2개 대회 우승이 있었다. 2014년은 인천 아시안게임이 있던 해다. 마지막 홀에서 3퍼트를 하는 바람에 최혜진 선수한테 출전권을 내줬다. 그 분노(웃음)로 KLPGA 3부 투어 가서 2승을 하고 준회원 자격을 얻었고 정회원 테스트를 가서 합격을 하면서 바로 시드전 통해 정규 투어에 오게 됐다.”
먼저 골프를 시작한 오빠의 어떤 모습을 보고 ‘나도 골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가?
“초등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갈 때 해외 훈련을 갔다. ‘똑딱이’밖에 못할 때였는데 필리핀의 한 섬에 들어갔고 거기서 현지인한테서 풀스윙을 처음 배웠다. 델몬트CC라는 곳이었다. 골프도 하고 말도 타고 그랬다. 그땐 골프가 재밌기만 한 운동인 줄 알았다. 오빠와는 동시에 골프를 시작했다. 어디 간다기에 나도 가야지 하면서 따라갔는데 실내연습장이었다.”
어릴 때 롤모델은 누구였나?
“학창 시절에 국가대표 언니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특히 김효주 언니를 진짜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말도 못 걸 정도였다. 효주 언니의 스윙 템포를 그대로 따라하고 싶어서 연습장에서 유심히 지켜보곤 했었다. 지금은 같은 학교(고려대)이기도 하고 언니가 잘 챙겨주는데 그땐 대화할 기회가 있어도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때 얘길 꺼내면 ‘쟤 왜 저러니’ 하면서 지금은 서로 웃어넘긴다. 타이거 우즈 스윙처럼 정석 스윙을 좋아했다.”
2015년 데뷔 시즌을 돌아보자. 두산 매치플레이 마지막 2m 버디를 놓쳐서 준우승했다. 이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준우승 후유증이었을까?
“그 버디 퍼트는 넣을 수가 없는 거였다. 88CC 그린 뺨치는 내리막 경사에 그린 스피드가 거의 4.0m였다고 생각해봐라. 어떻게 넣겠나. 그해 슈퍼루키라는 스포트라이트가 알게 모르게 부담이었던 것 같다. 박결 선수랑 친한데 의도치 않게 라이벌로 묶였다. 저희끼린 친한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 이상하게 거리감이 생겼던 것 같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나머지 다섯 대회인가 컷 탈락했다. 혼자 충격을 받았다가 또 얼마간 내려놓고는 두산 대회 때 좀 회복한 거였다. 매치플레이 대회는 다른 것 의식할 거 없이 상대만 이기면 되는 거니까. 공교롭게 첫판 상대가 박결 선수였다. 결승 간 것도 기대 이상 결과였다.”
최고 수준(연봉 2억 원 등) 대우를 받으며 데뷔한 것도 압박감으로 작용했을까?
“그런 것도 있었을 거다. 부담이 생기면 잘 못 이기는 스타일이어서. 편안하면 또 잘하는데. 뭔가 잘해야만 한다는 상황에 놓이면 결과는 늘 달아나더라.”
3년 차 시즌의 최종전에 첫 우승이 터졌다.
“메인 스폰서와 재계약이 걸려있었다.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살짝 내려놓은 상태였다. ‘스폰서가 없어지면? 스스로 잘해서 얻으면 되는 거지’라고 마음을 정리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우승이 왔다. 기존 스폰서와 재계약에 이르진 못했지만 이후 다른 기업과 계약에 성공했다.”
2019년은 가장 부진했던 해다. 상금 랭킹 53위로 마쳤으니. 5연속 컷 탈락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2018시즌 초에 2등, 3등을 했다. 제 딴에는 기대가 큰 시즌이었는데 그때 딱 슬럼프가 왔다. 하반기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보통 입스(샷 하기 전 불안증세)라고 하면 드라이버가 안 되거나 아이언이 안 되거나 하는데 저는 드라이버부터 아이언, 웨지까지 싹 다 입스가 왔다. 아이언을 치면 좌우로 20~30m씩 엉뚱하게 나갔다. 그게 2019년까지 계속됐다. 샷 미스에 있어선 좀 컨트롤이 되는 상태가 됐지만 이미 저만의 스윙을 잃은 뒤였다. 2019시즌을 앞두고 스윙 스피드 높이는 일에 빠지게 됐는데 체력적으로 좀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실전에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때부턴 오빠에게 온전히 교습을 맡기게 됐다.”
2020년은 우승은 없었지만 반등의 해였다. 아버지의 병을 알게 된 해이기도 한데.
“아빠가 병에 걸렸단 사실을 그동안 당신 혼자 껴안고 있었단 게 참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도 아빠와 하던 대로 장난도 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코로나19로 시즌 첫 대회가 5월에 열렸다. 아버지가 캐디를 맡는 선수들을 보면 감정적으로 힘들더라. 코로나로 부모님의 대회장 출입이 금지되던 때라 동료들도 아빠의 병을 몰랐다. 대회장 주변에서 가끔 ‘아버지 어디 가셨냐’는 인사를 받으면 그냥 ‘잘 계세요’하고 넘어가던 시기였다.”
두 번째 우승이 2021년 5월에 나왔다. 첫 승 뒤 3년 반 만이었다.
“아픈 아빠는 저에게 그저 제 위치에서 열심히 해달라고 하셨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빠의 바람대로 하는 것밖엔 없었다. 아픈 아빠와 힘든 시기를 겪는 우리 가족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성적을 내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잘 쳐야 한단 생각만 하면서 미친 듯이 했었다. 그 과정에서 감사하게 우승도 받았다.”
이제 다시 올해 우승 얘기로 돌아가자. 나흘 간 3퍼트가 딱 한 번이었다. 마지막 날 매 홀 첫 퍼트 거리감도 ‘예술’ 수준이었고. 어떻게 그렇게 해냈나?
“일단 저는 빠른 그린 스피드를 선호하는 선수다. 그리고 88CC 그린에선 내리막 경사에 볼을 태우는 느낌의 퍼트를 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넣는 게 아니라 무조건 홀 주변에 갖다 놓는다는 생각으로. 연습 그린에선 내리막 퍼트 연습만 팠다. 3퍼트가 한 번이었는데 그것도 순간적으로 욕심을 부려서 범한 거지 실수는 아니었다.”
경기 전 연습 그린에서 무선 이어폰을 끼고 퍼트하는 게 인상적이다. 서울경제 클래식 마지막 날 티오프 전엔 어떤 걸 들었나?
“이어폰을 꽂고 퍼트 연습하면 몰입이 잘 된다. 경기에선 퍼트할 때 가끔 갤러리분들 사이에서 휴대폰 음악 소리가 나올 때도 있다. 예전엔 그럴 때 당황했었는데 이어폰 끼고 연습하는 습관을 들인 후엔 실전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해도 신경이 안 쓰인다. 최종일 티오프 전에 들은 건 로제의 ‘아파트’. 전날에도 아파트 듣고 나갔더니 첫 홀부터 마지막 홀까지 속으로 계속 흥얼거리게 되더라.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아파트로 밀고 가자’ 했다.”
투어를 뛰면서 절대 안 바꾸는 것과 자주 바꾸는 것은?
“겨울에 클럽 후원사에서 새 모델을 주면 그 클럽으로 한 번도 안 바꾸고 시즌 끝까지 간다. (빨리 닳는 편인) 웨지만 교체할 뿐. 다른 것들은 바꾸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퍼트도 잘 안 되면 다른 퍼터로 교체해보고 샤프트도 좀 힘들다 싶으면 가벼운 걸로 바꿔도 보고.”
골프 말고 가장 잘하는 것은? 또 잘하고 싶은 건 뭔지도 궁금하다.
“잘하고 싶은 건 많다. 펜싱을 배우고 싶다. 마침 한 대회에서 구본길 선수를 만난 덕에 펜싱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영어도 잘하고 싶어서 집 근처 학원도 알아봐 둔 곳이 있다.”
골프 말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축구 보러 다니는 것 좋아한다. 백승호, 이강인 선수 진짜 좋아한다. 올해 A매치 ‘직관’도 세 번 했다. 직접 티케팅을 해서 간다. 한 번은 대회 프로암 끝나고 A매치 보러 간 적도 있다. 백승호 선수 유니폼을 들고 갔는데 경기 끝나고 관중석 쪽으로 인사도 해주셨다. 한 번씩 중거리 슛 넣어주는 모습에서 백승호 선수 팬이 됐다. 원래 축구를 정말 좋아해서 월드컵, 올림픽 등 다 챙겨본다.”
열 번째 시즌이 끝났다.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모습일까?
“지나간 10년은 험난했다. 앞으로도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힘내라고 기쁨도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겠다. 다른 기대는 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의 지한솔 골프, 골퍼 지한솔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를테면 색깔을 좀 설명해준다면.
“제 골프의 색깔…. 음, 산 같다고 하겠다. 급한 경사의 비탈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길도 있지 않나. 하지만 어떤 길이든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는 과정의 하나 아닌가. 앞으로의 지한솔 골프? 역시 산 같아도 괜찮다. 다만 손만 뻗으면 정상에 닿을 듯한 그런 산이면 좋겠다. ‘30분 컷’ 가능한. 제 인생은 한라산이어도 제 골프는 동네 뒷산이면 좋겠다.”
등산을 즐기나?
“비시즌엔 꼭 산을 오른다. 산을 타면서 깨달음을 얻는 게 많다. 이소영 선수랑 한라산 등반도 했었다. 거의 8시간 걸리는 제법 난코스로. 이번 겨울도 산에 오를 거다.”
지한솔 선수의 팬, KLPGA 투어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KLPGA 투어만의 응원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특정 선수들한테 쏠리는 현상도 좀 느껴지는데 다른 선수들한테도 응원을 보내주시면 더 좋겠다. 투어에 있는 선수들은 알고 보면 각기 다 실력 있고 대단한 선수들이다. 그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리고 싶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PROFILE
출생: 1996년 | 프로 데뷔: 2014년 | 소속: 동부건설
주요 경력:
2024년 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 우승(정규 투어 통산 4승)
2022년 제주삼다수 마스터스 우승
2021년 E1 채리티 오픈 우승
2017년 ADT캡스 챔피언십 우승
2014년 그랜드·삼대인 점프 투어 13·15차전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