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박현영 칼럼] 중년 여성 건강관리, 개인 문제 아니다

박현영 노원을지병원 심장내과 교수·전 보건연구원장

갱년기 증상, 개인 넘어 사회 손실 초래

과학적 정보 제공 적극적 치료 유도

인식 개선해 지역 의료 접근성 높여야





50세 전후의 많은 중년 여성들은 폐경과 함께 신체·정서적 변화를 경험한다. 추운 겨울에도 갑작스러운 열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밤에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화장을 해도 가려지지 않는 홍조는 외출을 망설이게 만들고 일상의 자신감마저 흔든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대화에서도 “다들 그 나이에는 그렇다”는 말과 함께 TV 광고에서 본 건강기능식품 이야기가 오간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불편함과 고통을 진지하게 나눌 대상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잃는다는 상실감, 혹시라도 ‘유난을 떠는 사람’으로 비칠까 하는 사회적 시선은 침묵을 강요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중년 여성들이 마주한 갱년기의 현실이다.

갱년기 증상은 폐경 전후 여성의 약 80%가 경험할 정도로 흔하다. 문제는 흔하다는 이유로 관리의 책임이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돼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30~50%의 여성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지만 국내 조사에 따르면 증상이 심해도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갱년기 자체는 자연스러운 생리적 과정이지만 그로 인한 과도한 신체·정신적 고통까지 ‘자연스럽게 견뎌야 할 일’은 아니다.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면 이는 분명 적극적인 관리와 개입이 필요한 건강 문제다.



이 시기의 여성들은 가정에서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돌봄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갱년기로 인한 신체적 불편과 정서적 불안정은 개인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가족 전체의 일상과 건강에 직결된다. 여성의 건강이 흔들리면 가족의 일상도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참여가 확대된 오늘날 갱년기 증상으로 인한 노동력 저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손실로 이어진다.

관련기사



그럼에도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갱년기와 치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의료적 개입에 소극적이다. 운동이나 건강보조식품,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약 20년 전 미국에서 발표된 여성호르몬 치료와 암 발생 위험을 연결 지은 연구의 영향이 크다. 당시 연구 결과는 과도하게 일반화되며 호르몬 치료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켰고 의료진과 여성 모두를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과학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간 축적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폐경기 호르몬 치료제에 붙어 있던 ‘블랙박스 경고’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심혈관 질환과 유방암·치매 발생 위험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호르몬 치료의 이익과 위험을 균형 있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다. 과거의 오해와 과도한 경고가 오히려 의료진의 처방을 위축시키고 많은 여성들의 치료 기회를 박탈해왔다는 인식에서 나온 조치다. 이로써 여성들이 의료 제공자와 상담해 건강에 대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는 갱년기 관리를 중요한 공공의료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영국은 국가 차원에서 최신 진료 지침을 제공하고 호르몬 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비용 지원과 처방 절차 간소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신건강까지 포괄하는 지원 체계는 갱년기 증상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고 필요한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학회와 의료 현장을 중심으로 진료 지침 개발과 갱년기 클리닉 운영이 이뤄지고 있지만 전반적인 인식 개선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특히 최신 근거에 기반한 치료가 지역에 따라 접근성 차이를 보이는 현실은 반드시 해소돼야 할 과제다.

여성 건강의 취약성은 결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된다. 갱년기는 여성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이며 이 시기를 중심에 둔 예방적 건강관리 체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하고 과학적인 정보 제공과 함께 갱년기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지속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갱년기를 단순한 생리적 변화로 치부하며 개인의 인내에 맡겨온 시대는 이제 지나가야 한다. 갱년기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관리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될 때 우리는 비로소 더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관련 태그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