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귀족적인 평민의 차가 완벽한 변신을 꾀하다

[JOY RIDE] 올 뉴 재규어XJ


품질을 타고 싶다면 토요타다. 품위를 타고 싶다면 BMW다. 허영을 타고 싶다면 람보르기니다. 권위를 타고 싶다면 롤스로이스다. 진정한 멋을 타고 싶다면 재규어다. 올 뉴 재규어XJ는 차를 아는 멋쟁이들을 위한 차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라이온스 라인이 달라졌다. 엠블렘에 있었던 박 차고 오르는 재규어 문양도 없었다. 올해 다 시 만난 뉴 재규어XJ는 글자 그대로 몽땅 새로 운 재규어였다. 재규어 탄생 75년을 기념하며 탈바꿈한 XJ는 이름 그대로 실험적인 재규어 eXperimental Jaguar였다. 1935년 윌리엄 라 이온스가 영국에서 재규어를 창립했을 때만 해 도 재규어는 자동차 산업의 후발 주자였다. 포 드가 T형을 만들어서 자동차를 대중화시킨 지 도 30년 가까이 돼가고 있었다. 미국에선 자동 차는 탈 것이었다. 자동차 종주국 독일에서조차 다임러벤츠가 찍어내듯 탈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윌리엄 라이온스 는 생각이 좀 달랐다. 자동차는 탈 것이 아니었다. 멋이었다. 입는 수트나 차는 시계처럼 운전자의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는 패션이었다. 라이온스는 재규어를 그런 차로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재규어의 혈통은 그렇게 고상하거나 귀족적이지 않았다. 지금 이야 영국 여왕이 타는 차로 각인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에 매다 는 보조 좌석을 만드는 무명 회사가 만든 깡통 차에 불과했다. 윌리엄 라 이온스도 태생이 평민이었다. 영국은 이미 왕을 위한 롤스로이스와 공작 을 위한 벤틀리와 백작을 위한 애스톤 마틴을 갖고 있었다. 평민이 만든 재규어가 낄 자리 따윈 없었다. 윌리엄 라이온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 족들보다도 더 귀족적인 평민의 차를 만들어 보일 작정이었다. 포드의 탈 것과도 구분되는 명차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윌리엄 라이온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습득한 항공기 제작 기술을 재규어에 적용한다. 1948 년 전설의 스포츠카 XK120을 내놓았다. 재규어XK시리즈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다. 라이온스는 1950 년 재규어 마크VII 세단을 선보였다. 마침내 최고급 세단 시장에 출사표 를 내민 셈이었다.


윌리엄 라이온스가 귀족보다도 더 귀족적인 평민의 차를 완성하는 데 까진 20년이 더 걸렸다. 재규어는 1950년대 XK엔진을 장착한 C타입과 D타입으로 르망 레이스를 석권했다.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했다. 재규 어 E타입은 지금도 모든 스포츠카의 원형으로 통한다. 길고 긴 엔진 부분 과 깡총 떨어지는 트렁크 부분으로 이루어진 디자인에선 아름다운 남성 미가 넘쳤다. 마침내 1968년 시대를 뛰어넘는 명차 재규어XJ를 완성했다. 윌리엄 라이온스는 당시 재규어XJ의 TV광고에 직접 출연했다. 이미 1956 년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라이온스 경이 돼 있었다. 라이온스 경 은 재규어XJ에 자신만의 서명을 남겼다. 엔진 덮개의 네 줄 주름이다. 유 명한 라이온스 라인이다. 먹이를 쫓는 맹수 재규어의 이마에 잡힌 주름을 연상시키며 재규어 앰블렘과 함께 재규어의 상징이 된 디자인이다. 당시 일흔 한 살이었던 라이온스 경은 1972년 은퇴했다. 그리고 1985년 사망했 다. 하지만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평민의 차를 남겼다. 그런데 2010년 재 규어 탄생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선보인 올 뉴 재규어XJ에는 네 개의 전 조등도 재규어 앰블럼도 없었다. 라이온스 라인도 못 알아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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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뉴 재규어XJ는 40년 동안 이어져 온 XJ시리즈의 디자인 전통에 서 완전하게 탈피했다. 피터 슈라이어, 크리스 뱅글과 함께 세계 3대 자동 차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언 칼럼 Ian Callum은 XJ를 XK처럼 바꿔놓았다. 1999년 재규어 디자인을 맡은 이언 칼럼은 XK의 재해석에 착수한다. 스 포츠카 XK야말로 라이온스 경이 창안한 재규어의 원형이다. 이언 칼럼은 2006년 런던모터쇼 행사장에서 언론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재 규어는 클래시컬하고 보수적이라는 인상 탓에 선입견을 심어줬던 게 사 실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최근에 그 움직임이 본격화되 고 있습니다. 현재 추구하고 있는 뉴 패션드 럭셔리 New Fashioned Luxury 브 랜드 전략이 그겁니다." 이언 칼럼은 새로운 XK를 이렇게 설명했다. "뉴 XK는 재규어만의 독특한 전통을 반영하는 재규어의 상징적인 모델입니 다. 뉴 XK는 지금까지의 재규어가 그랬듯이 컨템퍼러리 럭셔리 모더니즘 Contemporary Luxury Modernism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언 칼럼의 뉴 XK는 성공적이란 평가를 얻었다. 라이온스의 XK가 21 세기에 되살아났다. 이언 칼럼은 자신감을 얻었다. 마침내 재규어의 기함 인 XJ에 손을 대겠다고 작심을 했다. 2007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선 전포고를 했다. 콘셉트카 C-XF를 선보였다. 거의 고스란히 재규어XF로 출시된 C-XF는 이언 칼럼이 생각하는 컨템퍼러리 럭셔리 모더니즘이 무 엇인지 엿볼 수 있는 맛보기였다. 이언 칼럼은 젊은 윌리엄 라이온스의 마 음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영국은 계급 사회다. 귀족의 나라다. 하지만 윌리 엄 라이온스가 자동차를 꿈꾸던 1930년대는 모더니즘의 시대였다. 귀족 은 아니지만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평민 멋쟁이들이 런던 거리를 활보하 고 있었다. 19세기 댄디즘 Dandyism의 후예들이었다. 20세기의 댄디들이었 다. 젊은 윌리엄 라이온스도 댄디의 한 사람이었다. 댄디들은 고루하고 보 수적인 귀족 전통을 깨고 현재적인 취향들을 선보였다. 전통을 자유롭게 재해석했다. 그렇게 롤스로이스와 애스톤 마틴의 틀을 깨고 등장한 게 재 규어였다. 귀족적 취향을 머금었지만 평민의 차였기 때문에 재규어의 가 격은 당연히 벤틀리나 애쉬턴 마틴보다 낮았다. 미국이나 독일의 탈 것들 보단 비쌌다. 지금도 재규어는 니치 프리미엄 마켓을 지향하고 있다. 롤스 로이스, 마이바흐, 벤틀리처럼 비싼 값으로 장벽을 치는 콧대 높은 프리미 엄 브랜드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X타입 같은 엔트리 차종부터 XK 같 은 스포츠 차종을 거쳐 XJ라는 기함과 영국 여왕이 타는 다임러에 이르 기까지 요소요소 시장을 아우르면서도, 종합 자동차 메이커인 GM이나 도요타처럼 평민적이지 않은, 댄디한 브랜드가 재규어다.

이언 칼럼은 21세기에 다시 한 번 댄디즘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 듯하다. 실제로 재규어는 윌리엄 라이온스가 처음 자동차 산업에 발 을 디뎠을 때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고급차 시장은 선점당했고 대중차 시 장은 포화 상태다. 이언 칼럼은 뉴 밀레니엄의 새로운 현재성은 올 뉴 XJ 처럼 우주공학적이고 매끈한 유선형 디자인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XJ는 제 손으로 전통을 깼다. 1968년 첫선을 보인 이래 지속됐던 네 개의 재규 어 전조등을 없애고 XK와 흡사한 날렵한 눈매를 채택했다. XJ는 전설적 인 E타입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있다. 긴 엔진 부분과 상대적으로 짧은 트 렁크 부분은 E타입의 아름다운 남성미를 빼다 박았다. 재규어의 전통을 그리워하는 클래식 마니아들한테 이안 칼럼의 재해석은 불편한 구석이 있다. 언제나 전통을 뒤흔드는 혁신은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동반하기 마련 이다. 크리스 뱅글이 BMW를 재해석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모두가 크리 스 뱅글을 숭배한다.

XJ가 아쉬운 부분은 실내 디자인이다. 재규어는 멋으로 타는 차다. 가 격으로 타는 포드나, 품질로 타는 토요타나, 품위로 타는 벤츠와는 다르 다. 그렇다고 과시적인 벤틀리여서도 안 된다. 재규어는 귀족적일 뿐 귀족 만의 차는 아니기 때문이다. 서민적인 소박함이 묻어나야 한단 얘기다. XJ 의 실내 디자인은 소박함을 얘기하기엔 좀 속물적이다. 대시 보드를 감싼 천연 가죽은 너무 야하게 느껴진다. 정가운데에서 개구리 눈처럼 불룩 튀 어나온 두 개의 송풍구는 거슬린다. 재규어만의 변속기 디자인인 J게이트 가 없어진 건 슬프다. 다이얼 방식으로 바뀐 변속기는 편리해도 매력적이 진 않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영국 운전자들한텐 왼손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운전자들은 오른손을 J게이트에 올려놓는 재규 어 운전의 즐거움을 빼앗겼다. 실내 장식의 토대는 고급 원목이다. XJ 한 대당 한 그루의 나무에서 나온 목재만 쓰인다. 일체감을 높이기 위한 배려 다. 1,200와트짜리 B&W 스피커와 맞물리면 XJ 안에서 극상의 음악 감상 을 할 수 있다. 계기반도 흥미롭다. 풀 LCD다. 계기반 전체가 전자 디스플 레이 방식이란 얘기다. 스포츠 모드로 달리면 속도가 달아오를 때마다 계 기반도 붉게 물든다. 색다른 체험이다.

사실 댄디한 재규어를 얘기하면서 엔진 성능 따위를 논하는 건 어울 리지 않는다. 재규어의 댄디즘은 성능 위주의 독일 차나 품질 위주의 일 본차를 벗어나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차체는 100% 알루미늄이 어서 무게가 한층 가벼워진데다 터보 슈퍼차저 엔진이 달려 있어서 말 그 래도 포효하듯 내달린다. 재규어의 엔진 소리는 라이온스 라인만큼이나 유명하다. 1950년대 르망 레이스를 질주하던 시절부터 으르렁거리는 소리 로 경쟁자들을 제압했다. 많이 변했지만 XJ 역시 포효하듯 으르렁거리긴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강원도 태백까지 쉼 없이 내달렸다. 재규어가 사납 게 으르렁거렸다.


FO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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