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30대 실직자의 「우울한 설」

◎“철 들고 이렇게 괴로운 심정 처음입니다”/건설사 차장서 아무대책없이 정리해고/퇴직 모르는 고향부모 미안해 귀성 포기/퇴직금으로 장사 하려니 걱정부터 앞서『철이 든 나이 이후 올해같이 괴로운 심정으로 맞이하는 설은 없었습니다.』 건설업체인 S사의 차장으로 있다가 지난해말 회사를 그만둔 현영탄씨(38·가명)는 말로는 표현할 수없는 답답함과 좌절감으로 설을 맞았다. 그는 비자발적 실직자다. 그가 10년동안 다니던 회사는 경기부진에 따른 감량경영에 나섰고 그는 어떻게든 회사에 남으려고 노력했지만 노골적인 퇴사압력으로 아무대책도 없이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흔한 명예퇴직이라도 했으면 퇴직금이라도 좀더 많이 받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전업주부인 부인과 아들 딸 하나씩을 둔 가장인 그는 당장의 생활이 급했고 그래서 올초 다단계 판매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이 아니어서 그는 늘 조마조마하고 쫓기듯 하루하루을 보낸다. 현씨는 『올해는 고향에 가지 않는다』며 『본의 아니게 불효를 하게 됐다』고 말한다. 고향 춘천에는 양친이 계시는데 아직 그의 퇴직사실을 모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고향에 갈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을 뵙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어 고향행을 그만두었다. 고향에 안가는게 아니라 못가는 셈이다. 『아이들이 며칠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를 언제 보러 가냐고 보채는데 마땅히 댈만한 핑계가 없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는 며칠전 하루종일 할일없이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에 귀가해 천진난만하게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매일매일 처자식 얼굴 보기가 제일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체면도 체면이지만 앞으로의 생활이 여간 불안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갑자기 4식구 생계가 걱정이 될 때도 있다. 다단계 판매회사에 들어간 것도 우선 생활비라도 벌어야 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매일 영업이라고 뛰지만 겨우 찾아가는게 친구나 전직장에 있을 때 알던 사람들 밖에 없다. 처음에는 물건은 안사줘도 반갑게 맞아주던 사람들도 이제는 슬금슬금 피하고 있다. 스스로도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같아 싫다. 직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실업자다. 한달 남짓을 뛰었지만 겨우 8만원을 벌었다. 물론 이곳에서 누구는 월 1억원을 벌기도 한단다. 그러나 현씨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로만 여겨진다. 시작은 했는데 영 아닌 것 같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채용광고를 보거나 알음알음해서 취직원서를 몇번 내봤지만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도 많고 능력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습니다. 노후는 커녕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되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현씨의 하소연이다. 현씨는 설이 지난 며칠 뒤 3천여만원의 퇴직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조그만 장사라도 해볼 요량이지만 밑천도 달릴 것 같고 경험도 없어 여전히 걱정이다. 『내년 설, 아니 올 추석은 지금처럼 맞지는 않겠지요.』 현씨는 조그마한 것일지언정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들고 떳떳하게 고향에 내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힘없이 말했다.<한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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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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