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5일] 세이

[오늘의 경제소사/1월5일] 세이 권홍우 프랑스 최초의 경제학 교수, 보험사 직원이자 혁명전사, 잡지 편집장. 나폴레옹의 노여움을 샀던 학자이며 기업가. 세이(Jean-Baptiste Say)의 이력이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판로설)'의 주인공. 근대 경제학의 기본으로 군림했던 판로설은 대공황 직후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에 밀렸지만 위력은 여전하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원천이기도 하다. '기업가(entrepreneu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세이다. 1767년 1월5일, 리옹에서 태어난 그의 당초 인생 항로는 상인. 사회의 비주류인 위그노(신교도) 집안 태생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았다. 첫 직장인 보험회사에서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훗날 프랑스 재무장관에 오른 클라비에 사장의 권유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은 후 경제학의 바다에 빠졌다. 1789년 발생한 대혁명은 22세의 청년을 흥분시켰다. 시민군대의 척후병으로 활동했던 세이는 자코뱅당과 나폴레옹의 독재에 군복을 벗고 자유주의자 클럽이 발행하는 철학 잡지의 편집장으로 변신한다. 6년간의 편집장 경험은 1803년 명저 '정치경제학 요론'을 낳았다. 미국 3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사상 최고의 경제서'라고 극찬한 이 책자를 프랑스는 금서로 묶었다. 경제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에서다. 항로를 바꿔 영국의 최신 기술을 적용한 섬유사업이 큰 돈을 안겨줄 무렵,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세이의 학문도 되 살아났다. 아테네 대학과 프랑스 종합예술학교를 거쳐 파리대학 최초의 경제학 교수로 안착, 여생을 보냈다. 1832년 몰(歿). 후손들도 학자의 길을 걸었다. 보불전쟁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에 허덕이던 프랑스를 재정위기에서 구해낸 명(名)재무장관 레온이 그의 친손자다. 입력시간 : 2006/01/0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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