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9월1일 자정을 기해 영해를 4해리에서 12해리로 확대한다.’ 아이슬란드 정부의 발표에 덴마크와 노르웨이ㆍ네덜란드ㆍ서독 어선들이 아이슬란드 인근의 황금어장을 떠났지만 영국은 달랐다. 퇴거시한을 넘긴 것은 물론 어선단 보호를 명분으로 60여척에 이르는 함대까지 보냈다. 대형 구축함과 프리깃함으로 구성된 막강 영국 함대에 맞선 아이슬란드의 해상 전력은 고작 순시정 6척. 양국은 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게 됐을까. 영해확대 자체보다 대구(cod)잡이 때문이다. 어업에 90%를 의존하던 아이슬란드는 1954년 이후 경기침체가 인근 해역의 대구와 농어ㆍ연어를 싹쓸이하는 외국 대형 어선의 저인망식 어로 탓으로 파악하고 영해확대에 나섰지만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대구 요리를 유달리 좋아했던데다 뒷마당쯤으로 여긴 북해에서의 어선단 철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양국의 분쟁은 영국이 12월 중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조건으로 어선단을 철수시키며 막을 내렸다. 1차 대구전쟁으로부터 정확하게 14년이 흐른 1972년 9월1일에는 2차 대구전쟁이 시작됐다. 아이슬란드가 영해를 50해리까지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이슬란드 순시정들은 외국 어선의 그물을 끊어버리는 전술을 구사해 1975~1976년 발생한 3차 대구전쟁 때까지 써먹었다. 2ㆍ3차 대구전쟁에서 유럽 국가들은 하나같이 영국을 지지했으나 종결은 아이슬란드의 판정승. 200해리를 경제적 배타수역(EEZ)으로 인정하는 국제 분위기 속에 소련을 견제하는 전투 비행단을 아이슬란드에서 운용하고 있던 미국이 막후에서 영국의 양보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대구전쟁은 종료됐지만 대구 개체 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최근 대구 어획량은 반세기 전과 비교해 20% 수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