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4월 26일] <1680> 번시탄광 폭발


1942년 5월26일, 만주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本溪). 점심 무렵부터 연기를 내뿜던 번시 탄광(일본명 혼케이코 탄광)에서 오후2시5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아비규환 속에 목숨을 잃은 광부가 1,549명. 이전까지 최악이었던 프랑스 코리에르 탄광 폭발(1903년) 사망자 1,099명보다 훨씬 많았다. 역사상 최악의 탄광사고임에도 번시 폭발사고는 사료가 많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의 은폐 탓이다. 인근에 고구려 오녀산성이 있을 만큼 예로부터 양질의 철 생산지로도 유명했던 번시 탄광이 일제에 넘어간 것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오쿠라(大倉) 재벌을 앞세워 채굴에 들어갔다. 겉으로만 중일 합작이었을 뿐 일본이 단독으로 경영권을 행사한 탄광의 노동환경은 열악했지만 1931년 만주침략 이후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일본의 괴뢰 만주국이 들어선 후부터 광부들은 노예처럼 일했다. 패망까지 강제로 징발된 인력이 연 850만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석탄 분진 폭발이었으나 희생을 키운 요인은 두 가지. '정풍(停風)과 봉정(封井)'이다. 사고 직후 일제는 탄광시설의 연쇄폭발을 막는다며 헌병을 동원해 환풍기 가동을 중단하고 갱도 입구를 차단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갱도 입구에서 일산화질소에 질식돼 죽었다. 일제가 감췄던 사고의 진상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밝혀졌지만 아직도 베일 속에 있다. 전세계 탄광사고 사망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탄광사고를 언급하는 게 부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중국을 수탈했던 오쿠라그룹은 해체됐지만 국제적 건설회사인 다이세이(大成)건설과 제코쿠호텔그룹 등에 명맥이 살아 있다. 희생자들의 원혼은 언제나 풀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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