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리멤버

권홍우 <정치부장>

장엄, 그 자체다. 산악인 엄홍길이 에베레스트산에서 1년 전 실종된 후배 산악인의 시신을 기이어 찾아내 돌무덤에 안장했다는 소식에 몸을 떨었다. 지난해 5월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식 지명) 등반길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3명의 계명대 원정대원의 시신을 찾기 위한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서울을 떠난 것은 지난 3월14일. 원정대는 마침내 고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찾아내 초모랑마 산비탈에 묻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동료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은 세계 등반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이들과 같은 땅에서 한 공기를 마시고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역사가 증명한 기억의 힘 고작 몇 시간 산행도 힘든데 이들은 왜 바다 건너 그 높은 산에서 시간과 돈을 들이며 시신을 찾기 위한 77일간의 사투를 벌였을까. 산사나이들의 진한 의리와 깊은 뜻은 헤아리기 힘들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한국인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한과 눈보라가 살을 파고들어도 험산준령을 찾는 한국 산악인들은 더욱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으리라 믿는다.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기억(remember)’해주는 동료가 있으니까. ‘기억’ 또는 ‘상기’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가장 유명한 어구의 주인공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지난 1941년 12월 미 태평양함대의 주력함정이 정박 중인 하와이 진주만이 기습공격 당하자 루스벨트는 의회특별연설을 통해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the Pearl Harbor!)’며 미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그의 연설은 2차 세계대전의 분기점이었다. 적극 참전파와 관망파로 나뉘어진 국론이 통일되고 미국은 승리를 따냈다. 패배자의 역사여서 세인들의 기억 속에 각인돼 있지는 않지만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독일제국도 비슷한 수법을 써먹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대공부부가 피살당하자 카이저 빌헬름 2세와 독일군부는 ‘사라예보를 기억하라’며 전쟁을 부추겼다. 독일과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국민들이 광분의 분위기에 빠져든 결과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할 만큼 참혹하고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시간과 결과의 차이가 있을 뿐 1ㆍ2차 대전을 맞이한 상황에서 독일과 미국이 구사한 국론통일 과정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상처를 부각시켜 공분을 자아내 한곳에 결집시키자는 전략이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나 ‘사라예보를 기억하라’는 구호는 국가적 목표를 향한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기억’의 힘은 그만큼 폭발적이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대중의 기억’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루스벨트가 2차 대전 적극 참전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을 일부러 자극해 진주만 폭격을 유도했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존경받는 것도 전쟁을 향한 광기와 맹목적 애국심이 지배하던 1914년의 베를린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소수의 과학자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올 만큼 그들은 ‘기억’을 이용하는 것 뿐 아니라 역사에 미친 영향까지 파들어간다. 후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다. '망각'의 민족에 미래는 없다 한국은 ‘망각’의 나라에 가깝다. 친일과 압제, 용공과 인권유린을 밝혀내기 위한 과거사법이 겨우 통과된 마당에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반론이 당당하게 나온다. 국방부의 실미도와 군 강제집징, 의문사 등에 대한 조사는 착수하자마자 반대 목소리에 봉착했다. 국회의 과거사 진상규명이 논의 자체를 당리당략에 따른 정쟁 속에 파묻히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든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5월의 마지막 날, 산악인 엄홍길과 동료들이 만들어낸 드라마에서 ‘기억’의 힘을 본다. 힘들고 어렵다고,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을 그들은 해냈다. 기억의 영역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기억함은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다. 5월의 마지막 날 접한 산악인들의 뉴스는 아픔을 잊지 않고 끝내 이겨내는 우리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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