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2만弗시대 IT가 연다 <1-2>] IT코리아 1세대 3인방

80년대 중반 TDX국산화, 삼성등 IT기업 탄생 발판<br>

한국 IT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전문가들은 예외없이 80년대 중반 ‘국산 전전자식교환기(TDX) 개발’을 꼽는다. TDX 국산화를 통해 한국 통신산업은 본격적인 기술자립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축적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삼성전자 등 민간 기업들이 반도체ㆍ이동통신 등 첨단 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오명(현 과학기술부 장관)ㆍ서정욱(현 한국전자거래협회 회장)ㆍ양승택(현 동명정보대 총장)이라는 3명의 인물이 있다. TDX개발의 정책분야 담당자였던 오명 당시 체신부 차관의 진두지휘 아래 양승택(당시 TDX개발단장)과 서정욱(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TDX사업단장) 두 야전사령관들은 당시 모두가 불가능으로 여겼던 TDX 국산화의 산파역을 해냈다. ◇한국 정보통신 혁명가, 오명= TDX개발계획이 본격화된 것은 오 장관이 지난 81년 체신부 차관으로 부임 하면서부터다. 당시 41세에 불과했던 그의 차관 발탁은 파격이었다. 그의 발탁은 체신부 장관이었던 최광수씨와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김재익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이뤄졌다. 오명은 차관 부임 직후 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240억원의 예산을 국산 TDX연구개발비로 배정했다. 당시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책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기업들은 물론 체신부 직원들조차 대부분 “간이 부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만큼 무모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보다 더 강력한 것이 오명 차관의 의지였다. 그는 기술개발을 책임진 전기통신연구소 간부들에게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제출토록 했다. 연구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은 훗날 이를 ‘TDX 혈서’로까지 불렀던 것만 봐도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비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TDX개발의 주인공 양승택= 국산 TDX의 연구개발을 맡은 전기통신연구소 최순달 소장이 오명 차관에게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한국전자통신 상무인 양승택을 TDX개발단장으로 스카우트해달라는 것이었다. 오 차관은 삼성측의 강력한 ‘차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승택을 전기통신연구소의 TDX개발단장을 맡겼다. 최 소장이 양승택씨를 영입한 것은 그의 능력 못지않게 의욕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구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역에서 만난 양승택씨가 최 소장에게 자신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는 것. 훨씬 나은 급여 조건에서 일하는 삼성의 자리를 마다하고 ‘일이 좋아’ 연구소로 오겠다는 그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양승택씨는 한국 IT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사업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TDX 상용화의 꽃을 피운 서정욱= 서정욱의 등장은 TDX의 개발은 물론 상용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국통신의 TDX사업단장으로 옮기면서 TDX 기술이 현장에 실용화되는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사실 한국통신은 TDX개발 후에도 상용화에 소극적이었다. ‘국산’ 제품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 하지만 서정욱은 달랐다. TDX 양산과 한국통신의 도입에 사활을 걸고 뛰었다. 시험운용중인 장비에 문제가 생길 경우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시험용 장비운용 과정에서 한밤중에도 문제가 생기면 자는 연구원을 깨울 정도였다. 당시 개발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그를 ‘독종’으로 부르며 혀를 내둘렀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이들 3인방의 개척정신은 불가능을 하나씩 가능으로 바꿔가며 드디어 5년여만인 86년 3월 TDX 국산화 성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국산 TDX개발은 이후 삼성 등 개별 기업에게는 반도체 기술개발 등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자금력을 마련하는 바탕이 됐을 뿐 아니라 KT가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서비스사업자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