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화설비는 다 타버린 누룽지에서 쌀을 뽑아내는 기계다.”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지난해 인천공장 고도화설비(중질유분해시설) 신설계획을 밝히며 이 설비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새 쌀로 밥을 짓고 남은 누룽지에서 다시 쌀을 뽑아내는 ‘기적’이 정유사업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 같은 부가가치 혁명을 위해 과감한 투자가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현재 세계 석유제품시장은 경질유 위주로 완전히 재편됐다. 공해물질을 다량 배출하는 중질유는 원유보다도 싸게 거래된다. 때문에 세계 각국의 정유사들은 얼마나 고도화설비를 늘려 수익률을 높이느냐에 미래를 걸고 있다. 그러나 고도화설비 건설에는 기본적으로 조 단위의 투자금이 들어간다. 핵심부품을 만들 수 있는 회사도 한정돼 있어 공기도 오래 걸린다. 더구나 세계 석유제품 수요가 급감해 정유사들의 과감한 투자 집행이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래의 사업환경을 생각하면 투자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럴 때 설비투자를 감행해야만 경쟁국을 제치고 ‘한국판 오일달러’를 벌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유전(地上油田)’ 투자 서둘러야=정유사들이 보유한 상압 정제설비는 원유를 투입해 액화석유가스(LPG)ㆍ휘발유ㆍ나프타ㆍ경유ㆍ등유 등 경질유종도 생산하지만 전체의 40% 정도는 벙커C유를 배출한다. 문제는 각국의 환경규제 등이 갈수록 심해져 벙커C유의 세계 수요가 줄고 있다는 점. 현재 선박연료 외에는 이렇다 할 사용처가 없어 벙커C유는 늘 원유보다도 배럴당 10~20달러나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정유사는 경질유종에서 최대한 마진을 확보해 벙커C유에서 발생한 역마진을 상쇄해야만 한다. 고도화설비는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준다. 상압정제 과정에서 나온 벙커C유를 원료로 투입해 휘발유ㆍ경유 등 경질유를 다시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고도화설비를 땅 위의 유전, 즉 ‘지상유전’으로 부른다. 국내 정유사 중에는 S-OIL이 고도화설비를 서둘러 지어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히고 있다. S-OIL의 경우 지난 1996년과 1997년에 잇달아 완공한 하루 7만3,000배럴 규모의 촉매분해(FCC) 방식 고도화설비와 7만5,000배럴 규모의 수첨분해(하이드로크래커) 방식 고도화설비를 기반으로 탄탄한 수익구조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OIL의 상압정제 능력은 하루 58만배럴로 SK에너지나 GS칼텍스에 비해 작지만 고도화비율은 국내서 가장 높은 25.5%다. 미래를 내다 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특히 경질유 수출시장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GS칼텍스는 2007년에 두번째로 고도화설비를 완공, 중질유분해 능력을 하루 15만5,000배럴까지 늘려 현재 고도화비율이 22%에 이르고 있다. SK에너지는 상압정제 능력이 하루 111만5,000배럴로 국내 최대이지만 고도화비율은 상대적으로 낮다. 지난해 울산공장에 세번째 고도화설비를 완공해 중질유분해 능력을 16만2,000배럴로 끌어올렸지만 현재 고도화비율은 14.5%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SK에너지가 최근 좋은 실적을 낸 바탕에는 지난해 완공한 고도화설비가 주요 역할을 했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3ㆍ4분기부터 저부가가치 중질유의 대부분을 고부가가치 경질유로 전환해 생산량의 대부분을 수출, 상당한 영업이익을 올렸다”고 밝혔다. ◇국내 정유업계, 투자 적기가 왔다=이처럼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 10여년간 고도화시설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늘려 현재 수출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해외의 경우 2008년 기준으로 미국은 76.3%, 독일은 53.7%, 영국은 50.9%, 일본은 39.8%의 고도화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들 선진국 정유사는 자사가 생산한 벙커C유는 한 방울도 시장에 밀어내지 않고 전량 고도화설비 원료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제시장에 나온 값싼 벙커C유를 사들여 고부가가치 경질유로 바꾼다. 한국의 정유사들과는 수익구조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때문에 국내 업계도 시설 증설에 사활을 걸고 있다. GS칼텍스는 내년 완공 목표로 여수 공장에 하루 11만3,000배럴 규모의 세번째 고도화설비를 짓는 중이다. 이는 3조원 이상을 투자해 하루 6만배럴 규모의 수첨분해 방식 시설과 5만3,000배럴 규모의 촉매분해 방식 시설을 동시에 짓는 국내 업계 최초의 대역사다. 이 시설이 완공될 경우 GS칼텍스의 고도화비율은 38%로 국내 최대가 된다. GS칼텍스의 한 관계자는 “이번 공사에는 하루 2,000명에서 5,000명까지 연인원 330만명의 인력이 투입되고 상업가동 이후에는 회사가 300명, 협력회사가 200명을 신규 고용하는 등 경제적 효과도 크다”면서 “과감한 투자를 통해 회사의 미래를 밝히는 한편 지역과 국가경제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SK에너지도 인천공장에 하루 4만배럴 규모의 고도화설비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약 1조5,000억원이 투자되는 이 시설이 2011년 6월 완공될 경우 SK에너지의 고도화비율은 18.1%로 올라가게 된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사업이지만 기존의 단순 원유정제 방식으로는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면서 “국내 정유사들의 고도화설비 건설은 원가부담을 줄여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고유가 시대를 헤쳐나가는 훌륭한 방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S-OIL은 석유사업보다 부가가치가 월등히 높은 석유화학 부문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현재 S-OIL은 총 1조4,000억원을 들여 ‘온산공장 확장 프로젝트’라는 이름하에 합성섬유의 기초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생산설비와 석유화학 원료군인 방향족(BTXㆍ벤젠, 톨루엔, 자일렌)을 생산하는 아로마이징 시설을 증설하고 있다. S-OIL은 현재 연간 70만톤 규모의 PX와 30만톤 규모 BTX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2011년 6월 확장 프로젝트가 끝나면 각각 연산 160만톤과 58만톤 규모의 PX와 BTX 설비를 보유하게 된다. 이와 함께 S-OIL은 친환경 휘발유 제조에 꼭 필요한 알킬레이션을 추가 생산하기 위한 시설도 올해 안에 완공할 계획이다. S-OIL 관계자는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을 통해 더욱 적극적인 해외시장 개척이 가능해질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