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19일] 리처드 프라이스

[오늘의 경제소사/4월19일] 리처드 프라이스 권홍우 편집위원 보험계리의 원조이자 반체제 목사. 착한 노예로 지내느니 자유인으로 죄짓고 사는 게 낫다고 강조한 급진적 지식인. 국가채무의 원인을 금융자본과 정부의 야합이라고 규정한 왕립협회 회원.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 1723~1791.4.19)의 발자취다. 비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학 신동. 목사로 재직하면서도 1765년 왕립협회 회원으로 선출되고, ‘공정한 사회’라는 이름의 보험회사로부터 사망률 통계표 작성 의뢰를 받은 것도 확률 실력이 알려진 덕분이다. 드 무아브르와 핼리의 기존 연구를 바탕 삼아 하룻밤에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통계와 씨름한 끝에 결과가 나온 것은 1771년. ‘보험금 지급에 관한 고찰’은 19세기 말까지 생명보험과 연금요율체계의 바이블로 꼽혔다. 보험계리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것도 이런 연유다. 그의 친구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 최초의 손해보험사를 설립한 것도 그의 영향 때문으로 전해진다. 명성을 날린 프라이스는 관심 분야를 사회로 돌렸다. 신념인 인간의 자유를 위해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영국으로 압송된 식민지군 포로를 돌봤다. 프랑스혁명 직후 ‘영국인들도 나쁜 왕을 제거할 권리가 있다’는 그의 설교로 촉발된 에드먼드 버크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과의 논쟁은 18세기 영국의 보수ㆍ진보 논쟁으로 유명하다. 말년의 프라이스가 집중한 것은 국채. 잇단 전쟁으로 불어난 채무를 그는 정치인과 상인이 시민을 영원히 갈취하는 구조라고 공격했다. 아이러니는 그의 경험생명표가 그토록 걱정하던 국채를 늘렸다는 점. 짜임새 전체는 뛰어났지만 평균여명을 과소 평가한 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연금이 과다 지출됐기 때문이다. 반대로 같은 경험생명표를 사용한 보험사는 떼돈을 벌었다고. 입력시간 : 2006/04/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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