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들이 화낼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이면 정치인, 재벌 회장님과 비교하느냐고.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건달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대들을 등장시킨 것이니 부디 이해하시길.
건달은 결코 ‘쪽팔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신조와 자부심, 원칙이 있다.
한때 유행했고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곧잘 등장하고 있는 건달은 양아치와는 구별된다. 양아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비해 건달은 다르다.
건달은 그래도 최소한의 체면과 염치를 미덕으로 삼는다.
한국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던 영화 ‘친구’에서 스스로 건달이기를 자처한 두 남자 주인공은 양아치를 벌레 대하듯 한다.
경쟁조직에 몸을 맡기려는 장동건에게 유오성은 “그거 건달 아이다, 양아치다. 꼬마들한테도 약파는 거”라며 만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죽하면 여자를 꼬실 때나 싸울 때 등등 건달과 양아치의 차이점이 우스갯소리로 술자리에서 오고 갔을까.
이 영화의 끝 부분에서 친구 장동건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정에 선 유오성은 자신이 장동건을 살해하라고 사주했다며 죄를 시인한다.
나중에 면회 온 친구의 “니 와 그랬노, 미안해서 그랬나”라는 질문에 유오성은 “나는 건달 아이가, 건달은 쪽팔리면 끝이다”며 씨익 웃는다.
건달도 쪽팔리는 건 죽어도 싫은데 쪽팔리는 짓을 하고도 쪽팔리는 줄 모르는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뜨끔했을 것이다.
여기서 ‘쪽팔리다’의 사전적 해석은 얼굴이 팔리다는 뜻으로 부끄러워 체면이 깎인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체면이 깎이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야 될 때, 창피할 때, 부끄러울 때, 만나기 어색한 사람과 만날 일이 있을 때 등 실생활에 쓰이는 용도는 대단히 넓다.
건달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결코 건달을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건달보다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씁쓸하다.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고 대접받던 사람들이 쪽팔리는 짓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은 아무래도 꼴사납다. 적어도 쪽팔리는 것만은 아는 건달보다 못해서야 어디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겉으로는 국민과 사회 정의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목적 달성을 위해 양아치처럼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이들에게서는 심한 구린내가 난다.
최근 조재환 민주당 사무총장이 공천대가로 4억원이 든 상자를 전달 받다 현장에서 잡혔다.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 좀도둑들의 장물거래도 아니고 지하주차장에서 돈을 받다 잡혔으니 얼마나 쪽팔렸을까. 그러나 그의 변명을 듣고 있노라면 전혀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가벼운 선물인 줄 알고 차 키를 줬을 뿐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여차하면 해외로 피신했다가 ‘몰랐다,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마지못해 귀국하는 재벌 총수들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해외로 나갔다가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며칠 동안 머물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국하는 장면을 보는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하다.
24일 오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현대차그룹 비자금과 경영권 승계에 대한 검찰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 출장 길에 올랐다 귀국, 구설수를 자초했던 정 회장이다.
새파랗게 젊은 기자들의 질문과 검사의 조사에 응하는 칠순의 정 회장은 ‘쪽팔림’을 넘어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닥친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든 상황은 현대차그룹의 최고 정점에 있는 정 회장이 자초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 정 회장이 좀더 의연한 모습으로 오늘의 이 위기를 극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건달보다 못한 모습으로 비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에 대한, 아니 웃어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경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지겠다는 모습이 필요하다. 이제 제발 쪽팔리는 짓은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