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21일] 나가시노 전투


1575년 5월21일, 일본 중부 나가시노(長篠)성 외곽.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5,000여명과 다케다군 1만5,000명이 맞섰다. 수백명의 다이묘(大名ㆍ봉건영주)가 군웅할거하던 시절, 양대 세력 간 결전은 천하의 이목을 끌었다. 전망은 반반. 병력 차이가 심했지만 다케다군은 기병 위주였다. ‘호랑이’로 불렸던 다케다 신겐이 병사했어도 2년 전 노부나가ㆍ도쿠가와 연합군을 크게 물리쳤던 맹장들이 건재해 다케다 기마군단은 여전히 최강으로 손꼽혔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양군 진영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은 지축을 흔드는 듯한 다케다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에 깨졌다. 낮은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가속도까지 붙은 다케다군은 곧바로 거대한 목책에 맞닥뜨렸다. 속도와 돌파력을 상실한 기병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노부나가군의 뎃포(조총)가 불을 뿜었다. 다케다 기마군단은 끊임없이 날아오는 총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철포대(조총부대)를 3열로 구성해 교대로 사격하는 방식이 여기서 처음 선보였다. 결국 다케다군은 1만2,0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주하고 말았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의 중세 봉건시대를 마감한 것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도 바꿨다. 부하의 배신에 목숨을 잃은 노부나가 대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는 조선 침략에서도 나가시노 전투 방식을 그대로 써먹었다. 조선 북방군과 명나라의 정예 기마부대는 왜군의 3열 철포대에 무너졌다. 노부나가군 승리의 숨은 원동력은 보급. 광산을 개발하고 신화폐를 주조하는 등 경제력을 다진 노부나가는 하급무사들의 군복에서 뎃포까지 일괄 지급한 반면 다케다군 무사들은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사서 썼다. 승부는 전투 이전부터 경제력에 의해 갈렸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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