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2월19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명령 9066호'를 내렸다. 골자는 위험인물의 선별과 격리. 국방장관이나 지역 군사령관에게 민간인을 소개(疎開)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위험인물이란 다름 아닌 일본인. 진주만이 공격 당한 지 두 달이 지나며 극도로 나빠진 대일 감정이 일본인 격리수용의 배경이다. 명분은 일본계의 파괴행위와 스파이 활동 방지였으나 성인뿐 아니라 아기와 고아, 입양아, 병상의 환자와 노약자까지 12만명이 손가방만 지닌 채 10개 수용소에 분산 수감됐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도 '협조'를 구해 캐나다와 남미에서 2만6,000명이 잡혀 왔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동생 밀턴 아이젠하워가 책임을 맡은 수용소의 삶은 비참했다. 기관총좌가 설치된 감시탑 아래 비좁은 방에는 여러 가족이 동거하고 일본어 사용이 금지됐다. 일본이 식민지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처럼 미국은 매일같이 성조기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았다. 미국에서 단 한 곳 예외가 있었다. 일본의 침공 위협이 본토보다 훨씬 덜한 하와이의 일본계는 수감 대상에서 빠졌다. 인구의 38%를 차지하는 일본계가 수감될 경우 경제가 마비된다는 판단에서다. 일본계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기는 1945년 1월. 태평양전쟁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여긴 미국은 25달러의 차비를 주며 일본계를 집으로 보냈다. 일본인 강제수용은 전쟁으로 인한 집단적 광기의 발현이지만 미국사회의 양심과 일본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뒤늦었어도 1988년 '최악의 실수'라고 공식 사과하며 생존자 7만여명에게 1인당 2만달러씩 위로금을 지급한 미국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조선인 강제 징용ㆍ징병에 대해 진정 어린 사과와 보상을 한 적이 없다. 정신대 위안부는 아예 존재마저 부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