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가난한 삶

결혼기념일을 몇 주 앞두고 집사람은 갓 결혼한 아들 부부에게 이제는 가을 연례행사처럼 돼버린 필자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30여년 결혼생활 중에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가족과 같이 지낸 적이 손가락에 꼽힌다는 것이다. 그것도 며칠이 지난 뒤 귀띔을 해줘야 아차 하고는 ‘다음번에는 꼭…’ 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올해는 잘 챙겨달라는 암시이자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본받지 말라는 충고도 되지만 아무튼 회사 일에 매달려 가족과 여가를 즐기는 경우는 항상 뒷전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신입사원 시절부터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년 중 최소한 3분의1 이상은 해외에서 지내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소위 영어에서 말하는 (별로 달갑지 않은 호칭인) 중독자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이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인지 지난봄에는 건강을 크게 해쳤다는 진단을 받아 몇 개월 병원 신세를 졌다. 일에서 손을 끊고 병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지난 삶을 돌이켜보고 반성하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몸을 돌보라는 심각한 경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모처럼 가질 수 있는 여가마저 일을 위해 포기하는 것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결코 현명한 삶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영국 시인 윌리암 데이비스는 ‘여가(Leisure)’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근심걱정으로 가득할 뿐, 가던 길 멈추어 서서 눈여겨볼 여유가 없다면 가난한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질면에서 그런대로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잠시 멈춰 쉬며 여가를 즐기는 여유가 없으면 정신적으로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고,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풍요로우면 진실한 의미에서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흘 지나면 한가위 명절이다. 열심히 일한 노동의 열매가 맺어지는 가을의 풍요로움에 하늘께는 물론 조상에게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 넓게는 우리의 삶을 가능케 한 모든 것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음식의 풍요로움뿐 아니라 마음도 풍요로워 ‘부유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추석을 그려본다. 그런데 가만있자, 이번 결혼기념일에 피치 못할 해외 출장을 집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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