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12일] 섬터 요새-경제전쟁

1861년 4월12일 새벽4시30분. 섬터 요새에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부의 한복판 찰스턴 항구에 주둔하던 연방군은 3일 만에 쫓겨났다. 미국 남북전쟁의 시작이다. 남부와 북부는 왜 사생결단을 벌였을까. 경제적 이해대립 탓이다. 산업ㆍ금융자본이 지배하는 북부와 농업자본이 중심인 남부는 토지에서 중앙은행제도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맞섰다. 남부는 서부개척지에 대농장 건설을 원했던 반면 북부는 공산품을 소비할 자영농 육성책을 펼쳤다. 농산물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자유무역을 바랐던 남부와 달리 북부는 새로 시작한 제조업 보호를 위해 보호무역과 고율 관세를 밀고 나갔다. 도로와 철도ㆍ운하 등 운송망 확충에 대해서도 남부는 북부 제조업의 상권 확대를 위한 것이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면화와 담배를 실어낼 항만 건설이 남부의 주요 관심사. 남부가 연방중앙은행 설립에 반대한 이유도 금융시스템을 독점한 북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갈수록 벌어지는 지역격차도 남부의 불안심리를 부추겼다. 독립 당시 31대51이었던 북부와 남부의 소득 차이가 1860년 100대79로 뒤집혀진 상황에서 북부 출신의 링컨이 당선되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한 남부는 연방이라는 판을 깨고 나왔다. 섬터 요새에서 시작돼 4년간 이어진 전쟁의 결과는 경제력이 갈랐다. 인구 1,900만명 대 910만명(노예 350만명 포함), 철도 연장 2만마일 대 1만마일 등 2대1 수준이던 경제력 차이가 애초부터 승패를 결정한 셈이다. 전쟁 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남부는 1960년에 이르러서야 1인당 소득에서 전쟁 전의 수준을 가까스로 회복했다. 노예해방이라는 숭고한 이념으로 포장된 남북전쟁의 실상은 철저한 경제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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