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레임덕과 김정일의 선택


지난 5월 김정일은 갑작스럽게 중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5월과 8월 방문에 이어 1년 새 세번째다. 올해 방문은 당초 중국 최고지도부의 초청으로 김정은이 후계자 인준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중국행 열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정일이었다. 김정일은 3대 세습의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그는 2008년 뇌질환으로 쓰러진 후 후계자로 20대 후반인 셋째 아들 김정은을 내세웠다. 김정은은 지난해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회 위원과 북한 인민군 대장을 꿰찼다. 3대 세습 속도 조절 나서 하지만 김정일은 여전히 북한 권력의 핵심인 국방위원장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정은에게 부위원장 자리도 내주지 않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하기 1년 전에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아들에게는 권력의 전부를 주지 않고 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고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아들에게 권력의 전부를 주기는 불안한 모양이다. 김일성은 17년 전인 1994년 7월8일 새벽 2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7월25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첫 남북 정상회담에 경제협력 등 상당한 기대를 했던 김일성은 사망 전날 흥분된 상태로 회담 숙소인 묘향산 특각을 둘러보고 정상회담에 대비한 경제관계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에서 인민들이 최악의 경제사정으로 3개월째 식량배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김일성은 대노했고 그날 밤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현장에는 의사 1명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응급처치를 하지 못했고 상황을 전해들은 평양의 김정일이 헬기와 자동차로 의사와 의약품을 보냈지만 기상 악화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왜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절명했을까. 해답은 당시 김일성과 김정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1974년 당 정치위원에 선출되면서 당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선정된 김정일은 곧바로 '김일성주의'를 선포하고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김일성으로부터 당 사업을 전부 위임 받아 당을 장악한 그는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고 1992년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93년 4월에는 김일성의 마지막 군 권력이던 국방위원장까지 물려받아 당과 군을 양손에 장악했다. 김일성은 죽기 전 10여년 간 외교ㆍ대외관계에 국한해 활동하면서 "김정일 조직비서가 모든 국사를 맡아서 아주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근심걱정이 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우리 식 사회주의의 폐쇄성을 더욱 굳혀가면서 아웅산 테러사건(1983년), KAL기 폭파사건(1987년) 등을 자행하며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북한을 국제테러국가로 지정 받게 했다. 인민경제는 뒤로 하고 오로지 핵ㆍ미사일을 중심으로 한 무모한 군사대국의 길에 매진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1994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북핵 위기를 자초했다. 권력이양 시점 고민중 이에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전면전을 준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달았다. 그러자 김일성이 다시 전면에 나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의 정치적 실수와 경제정책의 실패를 알게 된 김일성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일성이 무슨 연유로 급사했는지는 훗날 역사가 증명하겠지만 입지가 대폭 줄어들 것을 우려한 김정일과 측근들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강성대국 원년인 내년 3대 세습의 마침표를 찍겠다고 공표했지만 김정일은 권력이양 시점을 고민하고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과거 정권을 장악해간 전철을 똑같이 밟고 있다.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정일은 자신의 아들과 또 한판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