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내시들은 가정을 꾸리고 살았으며, 여느 사람들처럼 족보도 가지고 있었다. 이번주 역사스페셜은 그동안 방송 드라마를 통해 불완전한 남성으로 역사 속에서 늘 천시받고 박대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내시에 대한 통념에 뒤집기를 시도한다. 「제3의 세력 내시」. 20일 오후8시 방송.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도심 한가운데 나즈막한 야산에 수십기의 무덤이 버려져 있는데, 여기서 발견된 비문으로 이곳이 내시들의 공동묘지임이 밝혀졌다. 여기에 남아있는 부부의 합장 흔적은 내시에게도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내시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족보 한 권이 남아있다. 족보를 처음 쓰기 시작한 조선조 정종 때 사람 이윤묵은 『내시들은 각각의 성을 가진 남자를 양자로 삼아 대를 잇는데 낳은 은혜 못지않게 키우는 은혜도 크기 때문에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라고 족보를 만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내시들은 자식도 거느릴수 있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내시들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더욱이 종종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양반들이 내시를 발로 차는 등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 역사스페셜팀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의주까지 피난갔다 왔다는 공로로 연양군에 봉해진 내시 김계한의 마지막 후손인 유재현씨와의 최초 인터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잘못 알려진 내시의 이미지를 바로잡고자 한다. 김계한의 15대손인 유씨는 『내관을 발길로 찬다든지 귀탱이를 쥐어박는다든지 반말로 욕을 한다든지 하는 장면은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해 왕의 최측근으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던 내시는 「제3의 정치세력」. 하지만 그들이 역사 속에서 늘 무시된 것 역시 사실이다.
역사스페셜은 어떤 사람들이 내시가 되었으며,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신분은 어떠했는지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알아본다. 불완전한 남성 내시들은 삶 자체가 통째로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결론이라 할수 있겠다.
문성진기자HNSJ@SED.CO.KR
문성진기자문성진기자
입력시간 2000/05/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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