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집의 수명

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어느 아파트 단지를 지나다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경축'이라는 플래카드가 멋지게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재건축이 시행되면 보통 용적률을 높이고 면적을 늘려 고층으로 다시 짓는다. 그러다 보니 진단 결과가 나오면 바로 집값이 오른다고 한다. '헌 집을 주고 새집을 받는' 집 주인 입장에서 보면 그건 정말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실 '안전진단 통과'라는 단어가 실제 뜻하는 의미를 생각하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안전진단 결과 조건부 재건축이 가능한 D등급은 사용과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한 상태, 재건축이 가능한 E등급은 집의 안전성이 극히 우려되는 불량한 상태라는 의미다. 살고 있는 집의 안전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진단에 우리는 저토록 즐거워하며 되도록 빨리 집을 부수고 사업을 시작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나라 공동주택의 평균 수명은 20.5년이라고 한다. 건축물 평균 수명이 141년이나 되는 영국이나 미국의 103년, 프랑스 86년, 독일 79년에 비하면 한없이 짧고 한때 부동산 거품이 컸던 일본의 30년, 최근 개발 붐에 휩쓸린 중국의 25년에서 비해서도 적은 숫자다.


주변에서 간혹 진지하게 '집을 지으면 과연 얼마나 오래가는지'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콘크리트 건축물은 50년 이상 100년도 쓸 수 있다. 목조건물도 수백년 된 사찰이나 한옥을 떠올려 보면 화재만 아니면 백년 이상 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벽돌 등 다른 구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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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의 수명은 근본적으로 구조의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개발 시기 벽식 구조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공간 구성의 다양성이 떨어지고 리모델링도 그리 쉽지 않은 형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철거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폐기물로 야기되는 환경 문제나 막대한 건설비용, 개별 세대마다 몇 배 이상 늘어나는 관리비 부담 등을 생각하면 여태껏 재건축을 통해 얻어왔던 이익이 앞으로도 보장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사실 집의 수명은 구조보다는 설비 수명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배관 등의 설비가 사용이나 수리 불가능한 상태까지 이르는 연수가 구조 수명의 5분의1~10분의1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호가 낡아 웃풍이 들이치고 녹물이 나오는 집들이 재건축 일 순위로 손꼽히게 되는 것이다. 용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사회 변화나 생활양식이 변화에 따라 기능적으로 가치를 잃는 건축물도 재건축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나 계단·기둥 등의 위치가 보편적이거나 어떤 용도에도 대응이 가능한 구조일 때 건물은 생각보다 오래 사용될 수 있다. 파리 퐁피두센터 외관의 강렬한 파이프라인들은 디자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낡으면 언제든 쉽게 교체가 가능하도록 건축가가 고려한 결과다. 지속 가능한 건설을 위한 장수명 주택 모델이나 생태건축 관련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결국 집의 수명은 구조보다는 사회적·경제적 요인에 따라 좌우된다. 여러 차례의 금융 위기로 재건축이나 재개발 등의 사업성이 무척 불투명해진 요즘 '안전진단 통과'를 축하하기 이전에 설비 교체나 수직증축 등 리모델링 관련 기술의 발전을 시간을 두고 좀 더 눈여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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