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대통령실

[되풀이되는 집권 4년차 증후군] 과거 정권 어땠나

YS, '노동법 날치기'후 힘 빠져<br>DJ, 3대 게이트로 당총재 물러나<br>노태우 수서특혜로 도덕성 타격… 대선 3개월전에 민자당 탈당<br>노무현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 민심이반에 열린우리당 문닫아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를 놓고 심각한 수준의 당ㆍ청 갈등이 나타나면서 이명박 정부 역시 집권 4년차 레임덕(권력누수)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11일 정치권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집권 4년차 증후군'은 지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역대 5년 단임 대통령 정부에서 매번 반복돼왔다. 집권 초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저마다 개혁을 추진하다가도 5년이라는 집권 기간 중 4년차에 들어서서는 각종 친인척 비리와 당ㆍ청 갈등 등으로 권력의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노태우 '수서', YS '노동법ㆍ아들'이 계기='3당 합당'으로 정치적 기반이 비교적 약했던 노태우 정부는 집권 3년차인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놓고 당과 대립각을 세웠고 당내 권력 2인자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이며 국정 장악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의 '차별화' 시도에 발끈해 대선 3개월 전 민자당을 탈당하면서 레임덕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중간평가 성격의 6ㆍ27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권력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집권 4년차인 1996년 12월26일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YS 정부는 치명타를 입었고 다음해 터진 한보사태는 그나마 있던 힘마저 앗아갔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최대 계파인 민주계 측근들의 비리가 한보사태와 엮어 터진데다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구속되면서 YS 정부는 사실상 국정을 이끌어갈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DJ '아들, 3대 게이트', 盧 '행담도ㆍ부동산'이 치명타=김대중(DJ) 정부는 YS 때보다 더 빨리 레임덕을 맞았다. 집권 4년차이던 2001년 가을 '진승현ㆍ정현준ㆍ이용호' 등 이른바 '3대 게이트'에 정권이 휘말린데다 동교동계를 겨냥한 여당 내 개혁파의 공세까지 이어지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당 총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DJ 정부도 대통령 아들 비리로 홍역을 치렀다. DJ 정부는 다음해 초 대통령 아들인 삼남 김홍걸씨가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기업들로부터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으며 같은 해 차남 김홍업씨는 기업체 이권청탁과 정치자금 명목의 돈을 받은 혐의로 역시 구속됐다. 잇따른 아들의 구속으로 힘을 잃은 김대중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후보 논의를 '당에 일임하겠다'고 선언한 뒤 '대선 불개입 선언'을 천명하면서 당에 대한 장악력을 손에서 완전히 놓았다. 노무현 정부는 특히 레임덕의 강도가 심했다. 집권 3년차에 터진 러시아 유전 개발과 행담도 개발 비리로 서서히 권력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4년차인 2006년 5ㆍ31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참패하면서 국정 장악력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여기에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가 민심이반을 불러일으켰고 집권 여당의 내분은 결정적으로 국민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했고 여당은 심각한 내부 분열을 거치며 창당 3년 9개월 만인 2007년 8월 간판을 내렸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도 비록 퇴임 후이기는 하나 형 노건평씨가 세종증권 인수청탁 명목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8년 구속돼 역시 친인척 비리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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