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한국의 베이비부머 황금연못을 찾아나서다] 1부. 노인을 위한 천국은 없다 <1> 달라지는 실버세대

"사회경험·지식 나누고 싶어요" 평생교육으로 새 인생 설계<br>건축가·교수 등 지낸 고급 인력들<br>"저소득층 아동위해 봉사활동" 영어구연동화 강좌 참여 등 잇따라<br>노래교실 등 단순 취미 활동 넘어 노인 전문 인력 양성 강좌 급증

한국의 실버세대가 변하고 있다. 고학력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베이비부머들(1955~1963년생)이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교육·봉사·여가생활 등을 중심으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실버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이호재기자


"볼록볼록 B, 꼬부라진 C, 배불뚝이 D~ 자, 율동도 한번 따라해볼까요."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노인복지관 5층의 한 교실 앞에서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강사의 손짓을 따라 알파벳을 그리며 아이들처럼 영어 노래를 배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노인들을 위한 초보 영어교실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수업은 알파벳을 배우는 노인들이 아니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노인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 실제 교육 현장에 투입될 영어구연동화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강사' 양성 프로그램이다. 고학력에 사회적ㆍ재정적 기반까지 갖춘 실버세대들이 제2의 인생을 위해 수준 높은 '배움의 장'으로 뛰어들고 있다. 여가를 위한 노래교실ㆍ서예교실 수준을 넘어 새로운 일자리나 의미 있는 자원봉사를 위한 전문 지식을 쌓는 곳들이다. 강남구 노인복지관의 '시니어칼리지'는 실버세대의 이 같은 변화를 확연히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전체 노인인구 중 23.1%가 대졸자, 노인 월평균 소득 197만원으로 전국 평균의 3배가 넘는 강남구에서는 지난 2009년부터 '시니어 칼리지'를 만들어 고급 노인 인력을 양성해왔다. 이날 출석한 '예비 강사'는 총 12명. 이광숙(64)씨가 최근 견학을 다녀온 강남 일대 영어 유치원 수업에 대한 느낌을 발표한다. 이를 듣던 최정석(62)씨는 책상 위에 펼쳐놓은 '갤럭시 탭'에 꼼꼼하게 메모한다. 눈빛이나 자세에는 벌써 강사로서의 전문성이 물씬 풍긴다. 이 프로그램의 보조강사로 나선 장수정 사회복지사는 "수업에 참여하시는 할아버지ㆍ할머니들의 면면도 화려하다"고 말했다. 실제 영어구연동화 수업 첫날, 자기 소개 시간에는 다양한 이력들이 쏟아졌다. 88대교 건설을 담당했다는 건축가, 은행 지점장,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등등. 대부분 외국 생활이나 유학 경험이 있는 이들은 이제 자신이 사회에서 쌓은 노하우와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또 다른 배움의 길을 가고 있다. 이날 복지관에서 만난 박수자(73)씨는 그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이력을 가졌다. 미국 보스턴대학병원 의사 출신의 박씨는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의학 분야에서 내 나이에 더 이상 봉사는 어렵다"며 "영어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외국 생활에서 익힌 정확한 발음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는 영어구연동화 강사 자격증을 따면 저소득층을 위한 영어교육에 뛰어들 생각이다. 그는 "압구정동 영어유치원 한 달 교습비가 150만원에 달하는데 웬만한 가정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며 "남은 인생을 교육여건이 취약한 저소득층 유아들을 위한 영어 강사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은행원 출신으로 퇴직 전까지 모 컨설팅사에서 MIS(경영정보시스템) 심사원으로 일했던 김관호(63)씨도 새로운 삶을 찾아 배움에 나섰다. 김씨는 "은행에 다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석사를 땄기 때문에 영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아내도 손자를 내가 가르치는 모습을 보자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하며 웃음지었다. 강남구의 시니어칼리지는 전문강사 양성과정과 고품격 고양강좌로 나눠진다. 이날 진행된 영어구연동화 강사(잉글리시 스토리텔러) 양성과정을 비롯해 전통놀이 지도사 양성과정, 미술 아카데미, 재태크 칼리지 등 전문화된 수업들이 실버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강남구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와 대학 및 공공기관에서도 이 같은 고급 노인 인력을 양성하는 전문 강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고령인구로 편입되며 노인 인력의 수준이 해가 갈수록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희경 노인인력개발원 차장은 "노인 전문 인력 채용은 아직까지 미흡한 것은 사실이지만 올해부터는 정부도 본격적으로 경력과 사회적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의 일자리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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