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4일] 피터 쿠퍼

[오늘의 경제소사/4월4일] 피터 쿠퍼 권홍우 젤리, 대통령 후보, 증기기관차, 대서양 횡단 케이블, 통화 증발. 서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부분집합으로 얽혀 있다. 공통분모는 피터 쿠퍼(Peter Cooper). 19세기를 풍미한 발명가이자 기업인, 박애주의자다. 쿠퍼는 ‘기름밥’을 먹고 자랐다. 1791년 모자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니고 집안일을 돕던 중 17세에 마차제조공의 도제로 들어가 기술을 익혔다. 독립 후 첫 사업인 가구공장에서 그는 뜻밖에 대박을 터뜨렸다. 목재를 붙이는 아교와 생선부레를 이용해 젤리 원료를 발명한 것. 미국 최초의 증기기관과 기관차, 자동 요람, 인공 정제염 생산도 그의 업적이다. 탄광업과 철도레일 제작에서도 성공을 거둔 그의 다음 사업은 해저 케이블 가설과 자선. 무선전신 발명가인 모르스를 부사장에 영입해 강행했던 대서양 횡단 케이블 공사가 끝난 직후인 1859년에는 학비 전액을 대주는 쿠퍼 유니온대학을 세웠다. 건축과 인문학, 공과대 등 달랑 3개 단과대에 대학원도 없고, 캠퍼스도 맨해튼 중심가의 고층빌딩에 파묻힌 5개동밖에 없지만 고소득취업 1위를 자랑하는 대학. 아이비리그 명문대보다 상위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카네기와 코넬 등이 기부와 대학 설립에 나선 것도 쿠퍼에 자극받아서다. 말년의 쿠퍼는 사업을 뉴욕시장인 사위와 수은 등을 발명한 외손자에게 맡긴 채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85세인 1876년 세금과 금리인하, 통화 팽창을 주장하며 그린백당(Greenback Party) 소속으로 대통령에 출마한 것도 수십년간 지속해온 인디언 권익 옹호와 노동자ㆍ농민 보호 운동의 연장선이었다. 대선에서 졌지만 그는 세인의 존경 속에 1883년 4월4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세무조사도, 유산을 둘러싼 왕자의 난도 없었다. 입력시간 : 2006/04/0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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