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불붙은 자원전쟁] 한국 유전개발의 악몽, 97년 외환위기

"수익성 없다" 구조조정 0순위 26개 유전개발사업 팔아치워

지난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의 해외자원개발사(史)에서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한국의 해외자원개발 속도가 경쟁국에 비해 한참 뒤처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한번 떨어진 속도는 10년이 지났음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 뒤 팔아치운 유전만도 20개 광구가 넘는다. 1997년의 연간 투자규모는 7억6,000만달러였는데 2002년 투자규모는 5억달러 수준에 불과했다는 점은 해외자원개발 기업들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기업들이 가장 먼저 매각한 것이 해외광구였고 가장 먼저 없앤 부서가 해외자원개발 담당부서였다. 장기적으로는 돈이 될지 모르지만 당장 회사의 급한 사정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해외석유개발 시작은 1981년 코데코에너지㈜가 인도네시아 마두라유전에 진출한 일이다. 1ㆍ2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자 정부 차원에서 자원개발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1978년에 해외자원개발촉진법을 제정해 해외자원개발사업에 대한 지원이 처음으로 제도화된 데 이어 1983년에는 탐사사업에 실패할 경우 정부융자금의 상환의무를 면제하는 ‘성공불융자제도’가 도입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석유개발 전문가의 절대적인 부족, 석유개발에 대한 경험 부족, 지질ㆍ탐사ㆍ개발ㆍ생산 등 분야별 전문가 부족 등이 원인이 돼 ‘고수익ㆍ고위험’ 사업인 탐사사업에만 편중되면서 성공한 경우도 많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1984년 석유공사, SK㈜ 등이 함께 지분 참여한 ‘예멘 마리브유전’의 탐사사업이 유일할 정도였다. 실패로 점철되던 10여년간의 해외자원개발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많은 실패 경험, 기술력 증진, 전문인력 보강 등을 토대로 투자비가 적게 드는 탐사사업, 광구매입비로 인해 많은 초기 투자비가 소요되는 개발ㆍ생산사업 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6년 처음으로 개발광구인 북해의 캡틴유전을 매입했다.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무렵인 1997년 말에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투자회수기간이 길어 투자만 하고 수익이 전혀 없던 석유개발 사업 부문은 구조조정 ‘0순위’ 대상이 됐고 1998년 이후 2002년까지 팔아치운 개발사업만도 26개에 달한다. 그 결과 외환위기를 벗어난 뒤에도 해외유전개발사업은 사실상 뇌사상태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200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유전개발사업은 석유공사와 SK㈜만을 통해 추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만큼 외환위기가 한국 해외자원개발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이 컸던 것.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 일관성이 부족했던 게 한국의 자원정책이었다”면서 “유가 하락기에는 개발은 도외시한 채 자원의 안정적 도입만을 강조하고 유가가 급등하면 자원개발을 강조하는 등 그때그때 상황에만 대처하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해외자원개발정책은 2004년을 계기로 바뀐다. 특정부처에 머물던 해외자원개발은 국가 어젠다로 격상돼 대통령 주재의 ‘국가에너지자문회의’와 ‘국가에너지위원회’가 신설됐다. 해외자원개발 관련 법도 개정되면서 2004년 이후 확보한 석유매장량이 1980년부터 2007년까지 확보한 총량의 62%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정부 관계자는 “물론 외환위기가 한국의 해외자원개발을 더디게 만든 모든 요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한몫한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외환위기가 미친 부정적인 파장이 10년 가까이 지속된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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