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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산책/12월 18일] 백제 근초고왕의 리더십

최근 KBS 1TV에서 주말 사극 '근초고왕'이 방영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이며 백제 11대 임금인 비류왕 때 고구려와의 대립 속에서 왕족 간의 암투를 그리고 있다. 극중 비류왕과 고구려 고국원왕이 회담했고 백제 태자가 고구려군의 포로가 됐다거나 하는 장면은 기록에 없는 허구다. 또 대방이 오늘날의 황해도라는 비정(比定)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대방은 백제의 전신(前身)인 십제(十濟)의 건국지로서 오늘날의 중국 요서지방에 있었다. 안정적 내외 통치로 기반 강화 사극의 역사 왜곡과 날조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지만 700년 백제사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근초고왕의 업적과 리더십을 재조명해본다. 그는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서 346년에 즉위, 375년까지 29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출중한 자질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백제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다. 근초고왕은 즉위 직후 가장 강력한 호족인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지지 세력을 확대, 이를 기반으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는 등 내치(內治)를 안정시켰다. 이렇게 먼저 국리민복을 도모한 뒤에 이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끌어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전개했다. 남쪽으로 마한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키고 동쪽의 가야 세력을 영향권에 뒀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국위를 널리 떨쳤다. 뿐만 아니라 신라와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동진(東晋)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요서지역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고 대방의 옛 땅까지 차지함으로써 본격적인 대륙 경영을 위한 군사적·상업적 거점을 확보했으며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했다. 이로써 백제는 건국 이후 사상최대의 영역을 확보했다. 근초고왕은 또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사를 정리한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했고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해줬다. 유명한 칠지도(七支刀)도 근초고왕이 왜에 하사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근초고왕 재위기를 가리켜 백제 최고의 전성기라고 하는 것이다. 근초고왕이 즉위해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고 재위 24년(369)에 군사를 사열하면서 황제만 쓸 수 있는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그가 천자(天子)를 자처했다는 반증이다. 다시 말해 백제를 천하의 중심에 두고 제국을 경영했다는 뜻이다. 드라마 '근초고왕'의 초반 전개가 엉성하고 지리멸렬한 까닭은 사서에 즉위 이듬해부터 재위 21년(366)까지 20년간 아무 기록이 없어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한 탓일 것이다. 사실 어떤 사서에도 근초고왕의 본명이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다. 성이야 당연히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夫餘氏)이지만 기왕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드는 만큼 좀 더 정확한 고증과 짜임새 있는 내용으로 근초고왕의 출중한 리더십과 위업을 시청자들에게 전해줬으면 좋겠다. 통치자 결단력에 미래 달려 역사를 되새겨보면 자질과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가 나라를 난국으로 이끌고 멸망에 빠뜨린 경우는 수없이 많다. 오늘날도 국정의 최고책임자든 기업경영의 총수든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하면 국가와 회사에 손해만 끼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망치기 십상이다. 최고지도자가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은커녕 외부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과감한 결단력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좌고우면한다면 나라의 안보는 불안하고 미래는 어둡다. 그런 까닭에 역사의 교훈을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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