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경제의 ‘고질병’으로 지목됐던 만성적 저성장은 일시적 경기침체 탓이 아닌 외환위기 이후 9년간의 그릇된 처방에 따른 탓이라는 게 삼성경제연구소의 진단이다. 외국자본의 금융지배, 불안한 노사관계,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 금융권의 쏠림현상과 시장불안 등이 전부 IMF 외환위기이후 획일적인 국제기준을 무리하게 강요한 결과물이라는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국제기준 미달이라는 이유로 묵혀뒀던 우리 경제의 고유한 시스템을 다시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형 ‘모순경영’ 도입해야 = 한국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형 경제시스템’의 부활이 필요할 것으로 지적됐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한국경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총론 발표에서 “외환위기의 수습과정의 후유증과 상흔으로 한국고유의 장점이었던 경제활력이 저하되면서 찾아온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패배주의가 현재 저상장의 배경”이라며 “한국경제의 저력에 대한 자신감만 회복하면 경제재도약이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한국형 모델을 “특정 외국시스템의 선택적 모방이 아닌, 모순경영을 응용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시스템”으로 규정했다. 한국경제에 적합한 유일무이하고 일관적인 제도를 찾으려 하기 보다 겉보기는 다소 모순적이고 국제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특정목표를 실현할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즉 언뜻 모순돼 보이는 ‘내수에 기반한 수출산업화 전략’, 한국형 기업시스템의 인정, 고성장을 통한 분배구조 개선, 작지만 강한 정부의 조정자 역할 등을 주문했다. 홍 상무는 “이제 한국 고유의 문화와 역사가 담긴 경로의존성을 중시하면서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외환위기 이후 기업투자를 가로막았던 과도한 규제정책이나 금융건전성에 대한 과다규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용불안 해소 등 대안정책 필요 = 삼성연구소는 또 과거 급진적인 구조개혁으로 경제 성장동력 훼손이 가장 크게 드러난 부분이 ‘내수’ 분야인만큼 이를 회복해 소비확대 →투자증진 →수출증가의 연결고리를 다시 꿰맞출 것을 요청했다. 최인철 수석연구원은 ‘87년 이후 한국의 경제시스템 변화’란 주제발표에서 “97년 이전까지 한국의 거시경제는 내수와 수출조화형 성장가능성을 보였다"며 “97년 이후는 소비가 견인하던 설비투자가 늘지 않고 내수부문 성장기여도도 1.5%포인트 급감했다”고 밝혔다. 즉 외환위기 이후 처방이 단기위기관리 성격이 강해 경제주체들에게 후유증을 남기고 만성적인 개혁의 관성에 젖게 만든 탓에 경제활동에 대한 의지를 상실시켰다는 것. 이로 인해 실질임금이 늘어도 소비는 늘지 못했고 목표수익률이 마이너스더라도 전략적 투자를 시행하며 위험을 감내한 기업들이 목표 수익률 16.2%이하에서는 투자를 하지 않게 됐다는 지적이다. 금융분야 역시 건전성과 수익성은 개선됐지만 주택담보대출 등에 대한 과도한 쏠림현상으로 자금중개기능이 크게 저하됐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금융권의 기업대출비중은 10년 불황을 겪은 이웃일본보다 낮은 41.7%에 그쳤다고 연구소는 밝혔다. 최 연구원은 "지금 한국경제는 수출주도형 거시경제에서 내수주도형 경제로 변화를 모색하는 매우 특이한 단계"라며 "통상적인 거시관리 정책 외에 별도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가장 시급히 해결할 사항으로 고용ㆍ교육ㆍ노후ㆍ주거불안 등 4대불안요인의 해소가 지목됐다. 단순한 소득증가로 소비증대가 이끌어내 지지 않는 만큼 건전하고 안정적인 생활여건 창출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아울러 수출과 내수 연결고리 확대를 위해 수출산업을 먼저 내수에 기반해 성장시킬 것도 주문됐다. 세계 최고수준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한국 휴대폰 등 디지털기기 산업이 국내를 ‘테스트 베드’로 쓴 점이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