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에 대해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의료계는 그간 소극적 안락사로도 볼 수 있는 ‘존엄사’를 인정해달라는 입장을 입법기관 등을 통해 계속해서 요구해왔다. 법적으로 존엄사가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실제 진료현장에서 환자와의 갈등이 빈번히 표출돼왔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는 판결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환자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회생 여부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존중해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대법원에서 최초로 허용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연명치료 중단의 요건과 의학적 판단인정 범위 등에 대한 조속한 법적ㆍ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좌훈정 의협 대변인은 “환자 및 가족의 정신적ㆍ육체적 고통해소 및 의료진과의 갈등 해결의 근거가 마련됐다”며 “그러나 이번 판결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또한 연명치료에 대한 법제화 작업이 탄력을 받고 사전의료지시서와 같은 환자가 사전에 자기의사를 명문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병원들이 급속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판결 전부터 연명치료 거부 환자에게 사전의료지시서를 받기 시작한 서울대병원에서는 3년째 항암치료를 받아온 76세 두경부암 환자가 처음으로 이날 지시서에 서명했다. 세브란스병원도 대학병원 중에서는 처음으로 자체적인 3단계의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이미 만들어놓은 상태다. 존엄사 가이드라인은 ▦뇌사환자 ▦여러 장기가 손상된 환자 ▦식물인간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환자들에 대해 환자와 가족의 동의, 의료위원회의 판단을 거쳐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남정현 한양대병원 병원장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 존엄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료 시스템을 갖출 것”이라며 “사전의료지시서 도입을 적극 검토하되 사전 의사표명을 못한 의식불명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히 접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소송 당사자였던 연세의료원의 박창일 의료원장은 판결 직후 “이번 소송으로 누구보다 힘든 과정을 겪었을 환자 가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며 “연명치료 중단은 판결문이 접수되는 대로 가족과 병원 윤리위원회 등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에 시행할 것”이라며 법원결정의 수용 입장을 밝혔다.
다만 박 원장은 “현재 의료 현장에서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식물인간조차도 보호자들의 존엄사 요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오늘 판결에서 제시된 가이드라인을 중심으로 각계의 의견을 모아 사회적 합의를 이룬 상태에서 존엄사 입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박사는 “대법원 판결로 존엄사에 대한 방향성은 제시됐지만 해결책까지 마련된 것은 아니다”라며 “앞으로 전문가들이 나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임종환자지침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