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 소리 어깨를 늘어뜨린 학생들 디스 이즈 더 시티 라이프.(넥스트 ‘도시인’ 중에서)’
고(故) 신해철씨가 부른 도시인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현대 도시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곡이 발표된 지 20여년이 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인들의 삶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바쁘고 쉴 곳 없는 공간. 갈수록 위로만 치솟는 고층빌딩들 속에서 도시인들은 쉴 곳을 잃어간다. 휴식도 돈을 지불해야만 할 수 있다. 직장인들은 점심 후 그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밥값과 맞먹는 커피값을 내고 커피숍을 찾는다. 그런 도시인들에게 비싼 커피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편히 쉴 공간을 내어주는 장소가 있다. 바로 ‘공개공지(公開空地)’다.
<도심 속 쉼터, ‘공개 공지’를 아시나요>
공개공지는 건물을 소유한 민간 건축주가 용적률 인센티브 등의 혜택을 받는 대신 자신의 땅 일부를 일반 시민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사적 영역 내 공적 공간’이다. 공개공지는 건축주가 도시라는 공공의 공간에서 개발이익을 취하는 대가로 내놓는 공간이다.
건축법 제43조에 따르면 공개공지 설치 대상은 5,000㎡ 이상의 다중이용건축물(문화집회·판매·업무·숙박 등)이다. 규모는 건물 연면적 합계에 따라 대지면적 5~10% 범위에서 설치해야 한다. 모든 건축물에 공개공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개공지 제도가 지난 1992년 6월부터 시행됐기 때문에 그 이전에 지어진 건축물에는 공개공지가 없다. 이를테면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건설사 대림산업의 옛 사옥인 대림빌딩(1976년 완공)에는 공개공지가 없지만 신사옥인 ‘디타워(2014년 완공)’에는 공개공지가 마련돼 있다.
공개공지는 도심 속 쉼터 역할을 한다.
이는 공개공지에 붙여진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름 위의 라운지(중구 을지로 삼성화재빌딩)’ ‘시원한 바람길(중구 서소문로 센트럴 플레이스)’ ‘바람의 언덕(서대문구 충정로 풍산빌딩)’ ‘아늑한 쉼터(중구 만리재로 서울역 디오빌)’ ‘품고 싶은 정원(종로구 율곡로2길 서머셋팰리스서울)’ 등이 대표적이다.
마치 서울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길목 군데군데 위치한 라이브카페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이 붙여진 장소라면 일단 쉬어가야 할 것 같다. 실제 이용자들도 이 같은 공개공지의 이름에 걸맞은 용도로 이곳을 찾고 있다.
서울역 서울스퀘어에 입주한 한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H(32)씨는 “점심 시간에 커피를 들고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며 “직장인들은 가뜩이나 광합성할 시간도 없는데 공개공지는 잠시나마 업무에서 벗어나 햇볕도 쬐면서 쉴 수 있는 귀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숨기고 싶은 공개공지, 제 역할 못하는 아쉬움>
환영받는 공개공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 이른바 공개공지가 ‘흡연공지’로 불리는 곳들이다. 도시에 마련된 공개공지 중 많은 곳이 직장인들의 흡연실로 사용되거나 영업행위를 하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예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공개공지를 꼭꼭 숨겨둔 인색한 건축주들도 많았다. 공개공지를 알리는 표지판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이 많다.
국토교통부가 제공하는 공간정보서비스인 ‘모두의 공간’에 따르면 서울시 전체 공개공지는 1,708개지만 이 중 추천 공개공지는 5.9%인 101개에 불과하다. 서울 전체 25개 자치구 중 공개공지가 가장 많은 강남구의 경우 총 386개의 공개공지 중 16개(4.1%)만이 추천 공개공지로 꼽혔다.
양천구와 은평구는 아예 추천할 만한 공개공지가 없었다. 건축주들의 무성의함은 공개공지에 붙여진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시민들이 많이 오가는 종로구에 위치한 공개공지 60개 중 이름을 가진 곳은 단 10개뿐이다. 공개공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실제 종로구에서 추천 공개공지로 뽑힌 7곳도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주가 나름대로 공개공지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시도 공개공지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부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부산시의 공개공지 총 372곳 중 약 30%인 107곳이 불법 영업행위와 광고물 설치 등 공개공지 취지에 맞지 않은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는 “공개공지는 공중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많은 건축주가 교묘하게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다행스러운 점은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들이 공개공지 활성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공개공지 실태조사를 연 1회에서 상하반기 각각 한 번씩 연 2회로 늘렸으며 공개공지 설치 가이드라인도 마련했다.
또 서울시 전체 공개공지에 대해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공개공지 가이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건축주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줄 계획이다. 현재 공개공지 활성화를 위한 용역도 진행하고 있다.
한병용 서울시 주택건축국 건축기획과장은 “공개공지는 접근이 쉽고 활용도가 높아야 하는데 현재는 설치 위치가 부적절해 이용에 불편한 곳이 많고 유지·관리도 잘되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관련 규정을 강화해 공개공지를 다중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물로 활성화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도시의 모습은 사람들이 있어야 달라진다”며 “사람들이 움직이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삭막한 도시 분위기를 바꾸고 도시의 품격을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개별 건축물에 마련된 공개공지의 연결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붙어 있는 건축물들의 공개공지들도 연결이 잘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며 각각의 공개공지들을 모아놓으면 규모도 커지고 활용도도 더 높아지는데 너무 작아 쓸모없는 땅이 되거나 계획되지 않은 공간이 만들어진다”며 “시에서 이런 부분들을 조율해 공개공지의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지구단위계획과 같은 대단위 계획 수립 시 공개공지가 들어설 위치를 개략적으로 정해 공개공지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 용산 국제업무지구와 상암동의 경우가 그런 예”라며 “앞으로도 이 같은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