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선사가 채권단 압박에 못 이겨 매각하려는 국내외 항만터미널은 단순 보유자산이 아니라 사업에 필수적인 전략자산입니다. 업황이 개선되면 몇 배의 돈을 주고 되사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난 17일 경기도 양평 현대블룸비스타에서 열린 한국선주협회 주관 사장단 연찬회에서는 해운산업 구조조정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업계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몇몇 대형 화주들이 위기에 처한 국내 선사에 등을 돌려 외국 선사에 일감을 맡기는가 하면 금융권은 중소 선사를 상대로 기존 대출을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터미널과 같은 전략자산 매각의 부작용도 상당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세월호 참사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2013년 이후 3년 만에 개최된 사장단 연찬회에서 해운업계는 한진해운·현대상선 국적 선사의 위기가 업계 전체의 위기로 인식되는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빅2 선사’의 구조조정 소용돌이에 멀쩡한 중소 선사까지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신규 금융거래를 꺼리거나 기존 대출금마저 조기에 상환하라는 금융권의 압박이 현실화하고 있다. 중소 선사의 한 관계자는 “기존에 유지하던 금융거래가 최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중단된 적이 있다”면서 “조선·해운에 대한 익스포저(위험노출액)가 크다는 막연한 판단에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돌변했다”고 토로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최근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신용경색”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건실한 중소 선사까지 구조조정의 유탄을 맞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 같은 금융권의 우려와는 달리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등 일부 대형 선사를 제외한 대부분 선사들은 운임하락 등 업황부진 속에서도 악전고투하며 선전하고 있다. 선주협회 집계에 따르면 151개 회원사 가운데 114곳이 지난해 영업이익을 냈다. 구조조정 중이거나 법정관리 중인 회원사를 제외한 148개사의 전체 영업이익은 1조9,000억원 수준이다.
‘비 올 때 우산 뺏기’ 행태를 보이는 것은 금융권만이 아니다. 국내 대형 화주 가운데 몇몇 곳은 해운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국내 선사에 맡기던 일감을 외국 선사에 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선주협회의 한 관계자는 “국내 대형 화주들의 국적 선사 이탈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자체 집계됐다”면서 “화주의 15~20% 정도는 해외 선사로 갈아탔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국적 선사의 알짜 터미널 매각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항만 내 터미널은 단순한 수익 목적을 넘어 대형 글로벌 선사들과의 영업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자산이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이 매각을 추진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항만 내 한진해운 롱비치터미널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연간 300만TEU(1TEU=길이가 20피트인 컨테이너 1개)의 물량을 소화하는 서부 항만의 대표 터미널로 한진해운이 보유한 터미널 중 핵심으로 꼽힌다. 한진해운이 자구 일환으로 이를 매각하려는 데 대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장기 성장을 위해 필요한 전략자산임에도 채권단 압력 때문에 일단 내다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이미 올해 3월 보유하고 있던 부산신항만터미널 지분 50%+1주 가운데 40%+1주를 싱가포르항만공사(PSA)에 매각했다. 현대상선의 부산항만터미널 매각으로 부산신항 내 21개 선석(船席·배가 정박할 수 있는 접안시설) 중 국내 선사가 보유한 선석은 한진이 보유한 4개가 전부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부산신항만을 으리으리하게 지어놓고 정작 우리나라 업체들이 아닌, 외국 기업과 펀드들이 대부분의 터미널 운영권을 쥐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