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남아돌고 돈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의 극단적인 상황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10년째 유지되고 있는 제로 금리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투자자들이 현금을 쌓아두려 하면서 은행들이 예금에 '페널티'를 부과하는 최후의 수단까지 꺼내 들었다. 은행으로서도 마땅히 돈을 굴릴 곳을 찾지 못하면서 예금에 수수료를 물려 밀려드는 돈을 차단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기관투자가의 자산을 운용하는 미국 보스턴 지역의 스테이트스트리트코퍼레이션은행이 거액 예금에 대해 수수료를 부과했다고 보도했다. 예대마진이 줄어 예금을 받는 것이 오히려 손해인데다 예금을 운용할 투자처도 마땅치 않자 예금에 이자를 주기는커녕 일종의 금고 사용료를 받고 나선 셈이다. 자산 기준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도 올해부터 1,500억달러 이상의 기관 예치를 거절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역시 지난해부터 기업고객들에 예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거나 수수료를 지급할 것을 요구해왔다. BoA는 특히 예금거래 이외에 자사와 다른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 고객을 수수료 부과의 타깃으로 삼고 있다.
WSJ는 이런 현상을 캐시(현금)를 둘러싼 갈등으로 표현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투자처가 사라진 가운데 기업이나 자산운용사들의 수중에는 돈이 넘쳐나는 반면 자금중개 역할을 맡아야 할 은행들은 돈 받기(예금)를 꺼려 한다는 것이다. 고객의 예금을 무작정 막을 수 없는 은행이 꺼내 든 카드가 바로 수수료라는 얘기다.
WSJ는 저금리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은행 건전성 규제도 은행들이 수수료를 부과하게 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들은 금융위기 시 은행들이 30일간 유동성 위기를 견딜 수 있도록 예금의 일정 부분을 중앙은행에 예치(지급준비금)하거나 국고채에 투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위기 시 자금인출 가능성이 높을수록 예금 가운데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비율(지급준비율)이 높아지는데 특정 기업 예금액의 40%를, 헤지펀드 예금은 거의 100%를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예치해야 한다. 지급준비금은 금리가 사실상 0%여서 기업이나 자산운용사의 고액 예금을 받아 40% 이상을 지급준비금으로 예치하면 은행으로서는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 금융시장에서 돈의 공급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건전성 감독을 강화하면서 뮤추얼펀드들이 현금보유량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은행들의 예금 수수료는 이런 뮤추얼펀드들의 예금을 막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는 것이 WSJ의 분석이다. 미국 연방예금보호공사에 따르면 올 2·4분기 미국의 국내 예금은 10조5,900억달러로 지난 5년간 38% 증가했다. 반면 예금 대비 대출비율(예대비율)은 2007년 92%, 2010년 78%, 올해 71%로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투자자들은 은행 예금 대신 미 국채나 초단기 채권펀드, 머니마켓펀드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주 판매된 1~3개월짜리 초단기 국채가 0% 금리에서 거래된 것도 이런 투자수요를 반영한 것이다.
돈을 둘러싼 갈등은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다. 연준이 중국 등 신흥시장 경기 침체로 9월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 금리인상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금리인상을 점치는 경제 전문가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FT가 미국·유럽·아시아 주요 은행의 이코노미스트 46명을 대상으로 미국의 첫 금리인상 시기를 물은 결과 65%가 12월을 꼽았다. 이는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앞둔 9월 연내 금리인상을 점친 전문가 비중(90%)과 비교하면 크게 낮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