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정책이 갈라파고스제도처럼 주변국들로부터 소외되는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미국·중국 등 강국들이 한국을 거치지 않고 북한 문제를 직거래로 풀려는 듯한 움직임을 연달아 내비치면서 우리나라가 한반도 평화·통일정책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다.
이 같은 기우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18일 자국을 찾은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과의 양자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국과 중국·북한 등 3국에 이어서 6자회담으로 가야 한다”고 밝히며 한층 표면화됐다. 노골적으로 한국을 배제한 3자회담 선(先)개최론을 공식 제기한 것이다. 틸러슨 장관도 3자회담에 대해 별다른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아 중국에 동조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을 제외한 채 ‘종전 선언→평화협정 체결→주한미군 철수’를 이끌어내려는 북한에 유리한 국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이 배제된 채 평화협정이 진행되면 과거 남(南)베트남 패망과 같은 상황이 한반도에서 재연될 수 있다. 박휘락 국민대 정치대학원장은 “1973년도 베트남평화협정(일명 파리협정)이 맺어질 당시 미국은 남베트남이 공격당하면 바로 가서 구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듬해 북베트남이 공격을 가할 때 미국은 곧바로 파병하지 않았다”며 “결국 1975년 북베트남에 의해 남베트남이 패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도 이런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직 외교부 장관은 익명을 요청하며 이 같은 한국의 외교적 고립 조짐이 최근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이후 (우리 정부가 한반도와 관련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게끔) 그렇게 외교의 길을 수년간 걸어왔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은 대북 강경노선으로 치달으면서 대화의 채널이 닫힌 상태이며 이로 인해 북한이 핵 개발, 탄도미사일 실험 등을 강행하며 안보를 위협할 때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주변국에 의지해왔다. 이 같은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대통령선거를 통해 들어서는 새 정부가 주도적으로 대북 관련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현 정부가 외교 카드의 여유를 남겨둬야 한다는 게 그의 제언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서울’을 거치지 않고 ‘베이징’을 통해 북한과 대화하려고 하고 중국도 ‘워싱턴’ ‘평양’과 직접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이는 한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적극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의 외교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지만 우리 현실은 ‘외교적 아노미(혼돈상태)’에 빠져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우선 현 정부는 대통령 궐위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 임기가 2개월도 남지 않은 상태여서 대외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오는 5월9일 대선을 통해 들어설 차기 정부도 야권의 비협조로 조각 작업이 늦어질 경우 외교수장의 취임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최소한 외교와 국방 라인은 새 정부가 집권한 후 우선적으로 인선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각 정당들이 사전에 정치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상반기는 물론이고 내년 3·4분기까지도 외교력 공백 상태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외교력이 단기간에 복원되기 어려운 만큼 국회가 나서서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 강국들과의 의원외교를 적극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각 당은 정략적 계산으로 인해 초당적 외교를 펴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지난달 여야 의원들과 함께 초당적으로 중국을 찾아 의원외교를 펼쳐 경색된 대중 관계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부 정당이 난색을 보여 무산됐다”며 “김영우 국방위원장이 20일 외교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방미를 한 것을 제외하면 최근에 이렇다 할 만한 의원외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병권·김능현기자 newsroo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