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생활

[디자이너 인터뷰]루비나, 세컨 브랜드 '루트원'으로 2막 인생 펼친다

잘 나가는 모델에서 변신에 성공한 원조 디자이너

루트원, 스타일리쉬한 데일리룩으로 경쟁력 갖춰

줄줄이 팝업스토어 오픈...홍콩 편집숍 등 수출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여전히 모델다운 몸매를 유지한 그녀. 모델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한국 패션디자이너의 원조. 그런데 또 다시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샘물 같은 디자이너.


최근 만난 루비나(사진)디자이너는 올 2월 새로 론칭한 루비나 세컨드 브랜드 ‘루트원(Route 1)’을 직접 챙기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패션업계는 ‘젠더리스(genderless)’와 함께 ‘에이지리스(ageless)’의 득세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이라면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입는 시대가 열렸다. 루비나씨는 “루트원은 20~30대를 겨냥했지만 40~50대의 루비나 고객들의 유입도 이어지고 있어 세대를 뛰어 넘는 브랜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자신했다.

루트원은 프리미엄 소재와 과감한 컬러 매칭, 입체적인 디자인 및 패턴으로 로컬 브랜드에서는 찾기 힘든 감성을 자랑한다.이자벨마랑, MSMG을 겨냥했지만 루트원은 이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고감도 디테일을 갖췄으면서도 가격이 착한 편이다. 이로써 루트원의 경쟁력은 패셔너블(fashionable), 웨어러블(wearable), 어포더블(affordabld) 즉 ‘3 ABLE’로 요약된다.

“루트원의 진가는 입어 봐야 압니다. 팝업스토어에서 시착한 사람은 다 샀을 정도로 벌써부터 반응이 좋아요. 보통 스타일리시한 옷은 특별할 때만 입을 수 있지만 루트원은 데일리룩으로 손색이 없다는 게 장점이에요. 시크함과 스타일리시함의 균형을 타는 것이 아무래도 어렵잖아요”

이처럼 자신만의 스토리를 창조하는 루트원으로 루비나씨는 제2 전성기를 예고했다. 반응은 이미 뜨겁다. 코엑스 현대, 애비뉴엘, 판교 현대, 로데오 거리의 멀티숍 오프너 등에 줄줄이 팝업스토어를 연다. 홍콩과 캐나다 편집숍으로부터 러브콜도 이어져 론칭과 함께 곧바로 수출도 기약했다.

루트원루트원




패션 시장은 지금 무한 경쟁이다. 유니클로, 자라, H&M과 같은 글로벌 SPA 브랜드는 물론 수입 럭셔리, 컨템포러리 브랜드 등 웬만한 브랜드가 국내에 들어와 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브랜드까지 편집숍에 속속 자리를 틀고 있는 데다 패피 직구족들도 급증해 디자인과 가격, 품질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는 발붙이기 힘든 실정이다. K-패션도 덩달아 많이 성장했다. 인접한 패션 국가 일본도 한국 사람들이 옷 잘 입는다고 혀를 내두른다. 한국 신진 디자이너들은 해외 패션 어워드에 출전해 상도 받고 이름도 많이 알렸다. 그러나 아직 멀었단다. 루비나씨는 “K-패션이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탄탄한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내 많은 브랜드가 생겨 나고 있지만 비용이 뒷받침되는 마케팅 능력이 부족해서 번번이 좌절하고 있어요. 일본의 꼼데가르송,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는 정부에서 패콜렉션을 지원해 주고 해외 진출을 적극 도와 커진 대표적인 브랜드죠. 우리 브랜드는 해외에 나가려고 할 때 스폰서가 없다보니 각자 개인이 그 비용을 전담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주머니가 가벼워 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K-뷰티, K-푸드와 함께 K-패션을 세계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전시 행정을 펼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지원 사업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패션과 같은 문화사업은 결과물을 당장 보는 것이 아닌 만큼 장기적인 시각을 가져가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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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K-패션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태리 소재’ ‘로로피아나 소재’의 경우처럼 정부와 민간이 합작해 우리만의 독보적인 ‘메이드 인 코리아 섬유’를 만드는 게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한국이 자체 소재를 개발함으로써 원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데다 소재 수출 수익까지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 우리만의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추진됐던 과거 대구의 ‘밀라노 프로젝트’는 섬유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추진됐지만 정치 논리에 휩쓸려 헛돈만 날리고 실효성 없이 실패함으로써 ‘코리아 소재’의 꿈이 물거품이 된 바 있다. 루비나씨는 “이태리 섬유를 사올 경우 대량만 판매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고 대신 수입을 하다 보면 이중 관세로 옷의 가격이 급등해 가격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털어 놨다.

1970년대 모델 활동 시절1970년대 모델 활동 시절


루비나씨가 자신의 브랜드를 처음 선보인 것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대학교 때 길에서 픽업돼 모델의 길로 접어든 그는 1년 만에 톱 모델로 우뚝섰다. 그는 준비된 모델이었다. 워낙 패션에 관심이 많아 초등학교 때 스타킹에 무늬를 디자인해 다르게 스타일을 연출했고 신고 있던 고무신에 길거리 아스팔트 진액을 녹여 구두 굽을 만들어 힐처럼 신고 다닐 정도로 감각이 남달랐다. 어머니가 버린 자투리 천을 이용해 치마를 만들어 입기도 한 게 초등학교 때라니 숨은 끼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델로 진입한 후 처음 열린 수영복 패션쇼에서 신인이던 그는 당시 런웨이에서 ‘디스코쇼’를 파격 선보여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톱을 달리던 루비나씨는 이제 곧 내려올 일만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평소 관심이 많던 의상 디자이너로 전향을 결심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이렇게 잘 나가다가 내려가면 자존심이 크게 상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모델들은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없었던 탓에 쇼 준비를 직접 해야 했거든요. 동대문에서 단추를 사와 옷도 리폼하고 머리도 화장도 혼자서 했죠. 동료 모델의 스타일을 내가 거의 해 줄 정도였지. 이 정도면 내가 옷을 만들어도 되겠다 싶었어요.” 결심이 서자 그는 보름간 두문불출하며 스케치에 전념한 후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을 사다가 옷을 만들었다. 처음 고객은 동료 모델들이었다. 론칭 2년 만에 선보인 옷들이 대박을 치면서 대중성을 인정받았고 1982년 남산 하얏트 호텔에서 첫 개인쇼를 열었다. 쇼에서 선보인 모든 옷이 전부 판매됐다. 1984년 ‘루비나’를 정식 론칭, 그는 출발과 동시에 국내 대표 디자이너로 자리를 굳혔다.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며 패션쇼를 했고 만들어 내는 족족 모두 팔려나갔다. 디자이너 가운데 소재 개발을 가장 많이 했다. 소재 믹싱에 열중해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루비나씨는 하늘과 허공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아이디어를 얻는다. 사우나에서 머리를 비우고 있을 때 ‘유레카’를 외칠 때도 많다. 그는 “만물 창조주 하나님의 DNA가 내게 있다고 확신한다”며 “심지어 루비나 SS콜렉션의 나뭇잎이나 꽃잎 패턴 영감은 신호등에서 대기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떠올린 것”이라고 귀띔했다.

루비나씨는 오는 5월 서울역 고가 공원 개장을 기념한 ‘서울365-다시 세운 패션쇼’에서 루비나 패션쇼를 선보이며 또 한번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한다. ‘재생 재사용 친환경’ 콘셉트로 진행될 예정으로 송지오 디자이너와 함께 선정됐다. 모델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 모델이 아니라 모델 지망생을 세운다. 후학 양성을 위한 꿈도 야무지게 키우고 있다. 그는 소재 등 디테일을 많이 만들었던 디자이너로서 ‘패션을 완성하는 장식’의 가이드가 되는 책을 쓸 계획이다.

심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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