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11시56분. 문재인 대통령이 업무를 보고 있는 청와대 여민관에서 나와 경내 상춘재 앞에 도착했다. 청와대에 부속된 한옥건물인 상춘재는 대통령이 귀한 손님을 만나는 데 애용하는 장소였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 상춘재에 문 대통령이 취임 9일 만에 나선 것은 주요 5개 정당의 원내대표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정오를 갓 넘은 시점부터 원내대표들이 각각 도착했다. 마지막 주자인 정우택 자유한국당,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도착한 시간은 낮12시6분. 문 대통령은 최장 10분가량을 상춘재 앞에 먼저 도착해 외빈을 맞은 셈이다. 통상 원내대표들이 먼저 도착해 대통령을 기다렸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의전이었다. 그만큼 파격적으로 국회를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아흐레 만에 원내대표들과 만난 것은 각종 국정 현안을 여야와 함께 협의해 풀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 궐위로 조기 선거를 통해 갓 출범한 새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꾸리지 못해 여러모로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다. 경제·사회·외교 등에서 각종 현안들이 국정의 불안 요소로 잠재한 상태다. 이런 난국을 여소야대의 핸디캡을 안고 출범한 새 정부가 홀로 돌파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이날 여야 원내대표들과 스킨십을 갖고 서먹한 관계를 깨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통해 협치의 시동을 건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의제 중 가장 돋보인 것은 여야정 상설협의체다. 국정 현안을 정치권과 정부·청와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일종의 ‘빅테이블’이다. 당초 원내대표들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여야정 협의 채널을 요구하려 했는데 문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이를 제안했다. 첫 실마리부터 풀린 여야 원내대표들은 곧바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협의체 설치가 합의됨에 따라 곧 이를 위한 실무협의가 개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각 정당들이 지난 대선 기간에 내건 공약 중 공통되는 부분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문 대통령이 제안한 점도 이날 회동을 한층 화기애애하게 했다. 이 자리에서는 문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 공약의 하나로 약속했던 비정규직 해소 방안에 대해서도 원내대표들과 폭넓은 논의가 있었다고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아울러 일자리 창출을 위해 향후 정부가 제출할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해서도 국회 협조를 당부했다. 이는 정부 출범 후 열릴 첫 국회에서 추경이 여야 갈등을 촉발할 주요 의제 중 하나임을 감안한 요청으로 풀이된다.
이 밖에도 국정 로드맵을 마련해달라는 일부 원내대표의 건의에 문 대통령이 국정기획자문위원회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논의하겠다고 화답한 점이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반대 입장을 명시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며 유연한 자세를 취한 점도 앞으로 정국 갈등 요소를 최소화해 선택지를 늘리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현재 여당이 5당의 공통 공약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이르면 이달 하순께 윤곽이 잡혀 다음달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므로 이것이 여야 간 협치를 매개하는 공통 의제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