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74·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내 진보정치학계의 큰 산이요 높은 봉우리다. 최 교수는 지난 2013년 안철수 당시 의원(무소속)을 돕기 위해 정책 싱크탱크 ‘내일’의 이사장을 석 달 동안 맡은 것을 제외하면 줄곧 정치권과 거리를 둔 채 연구에만 몰두해왔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저술활동 역시 무척 활발하다. 최 교수는 올해 2월 ‘양손잡이 민주주의’의 공저자로 참여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정치의 공간’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국내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강대국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한국의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한 해법을 두루 제시했다.
인터뷰 전 “민감한 정치현안과 관련한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 책 얘기만 하자”고 방어막을 치던 최 교수는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현 정부와 보수야당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새겨들을 만한 조언과 충고를 쏟아냈다. 인터뷰는 지난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에서 1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대담=서정명 정치부장 vicsjm@sedaily.com
우선 보수발(發) 정계개편에 대한 생각부터 물어봤다. 진보학자로서 보수진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통합파’ 수장인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이 지난 27일 해외 국정감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보수통합의 향배는 이번주에 중대 분수령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최 교수는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이 다시 합친다면 한국 정치는 또 한번 퇴보할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전까지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해온 보수·우파가 스스로 개혁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정치발전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소신을 피력했다.
최 교수는 “탄핵과정에서 나타난 촛불집회는 비뚤어진 보수가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꾸짖음이었다”며 “한국당과 바른정당이 손을 잡고 예전 그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과거와 같은 패권적 정당의 지위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보수의 환골탈태야말로 궁극적으로 한국 정치의 민주주의를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촛불시위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보수정부들에 의해 권위주의로 역행할 수 있는 위험한 경향에 시민들이 제동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보수 주류가 극우가 아닌 온건 성향의 개혁적 보수로 새로 태어난다면 과거보다 안정적인 주류 정당으로서 한국 정치를 주도할 가능성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화제의 초점은 보수의 앞날과 미래에서 문재인 정부의 지난 6개월에 대한 평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보수·우파라고 무조건 폄하하지 않던 최 교수는 진보정권의 정책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추어올리지도 않았다. 최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정치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현실적 진보주의자’로 소개했지만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그를 규정하기 힘들 만큼 유연하고 열린 태도를 보였다.
그는 “진보적인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정권이 선거에서 참패한 보수진영을 ‘아웃’시키고 원하는 바를 관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이어 “진보의 생각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가치관이 다른 보수 야당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여당의 의석이 절반에 한참 모자랄 뿐 아니라 다당제 구조로 된 의회 상황에서 대화와 협치는 문재인 정부의 ‘필수조건’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등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속도 조절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니 자영업자들이 힘겨워하고 또 비정규직을 일거에 정규직으로 바꾸면 기업들이 이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의 경우 정부가 인상분을 보전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정부 지원이 앞으로도 막힘 없이 이뤄지려면 결국 증세밖에 대안이 없다”며 “다양한 경제주체가 얽힌 정책은 방향이 옳더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 교수는 “적대적인 투쟁에서 벗어나 협력적 노사관계 모델을 구축한 유럽의 선례처럼 한국 역시 노사정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조합이 과거처럼 투쟁에만 매몰되면 발전적 노사관계를 기약할 수 없다”면서 “전투적이고 과격한 행동방식 탓에 중산층을 비롯한 일반시민은 여전히 노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 교수의 이런 발언은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정치학자가 사실상 민주노총과 대기업 강성노조를 겨냥해 일침을 날린 것이어서 주목된다.
북핵 위기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의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최 교수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활화산의 정상’에 빗댔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에 결함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보수야당이 부르짖는 대북 강경책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고 있으니 우리도 전술핵을 도입하자거나 핵 무장에 나서자는 주장은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며 “핵과 핵의 균형을 맞추면 전쟁위기가 수그러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충돌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면서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현재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의존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인 방안”이라며 “남북관계의 일차적 목표를 평화로 삼고 한국이 국제정치 질서 안에서 독자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개헌에 대해서도 명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6월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권력구조와 같은 핵심쟁점을 둘러싸고는 정당별로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갈려 최종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 미지수다. 최 교수는 “지난 1987년에 민주화를 달성한 후 벌써 30년이 흘렀다”며 “5년 단임제의 약점과 폐해가 분명한 만큼 개헌할 시점이 도래했다고 본다”고 했다.
최 교수가 보기에 5년 단임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이 권력구조 아래에서는 모든 정치가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정당은 대통령선거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대중의 관심 또한 이 선거에만 쏠린다”며 “사정이 이렇다 보니 권력 집중을 견제하면서 대의민주주의의 확고한 축으로 기능해야 할 입법부와 사법부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취약해졌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기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의회중심제(내각제)를 선호한다”며 “의회중심제를 기반으로 정당이 강해져야 사회적으로 다양하게 분출하는 요구들을 입법과정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