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日 언론인 고미요지, 北 김정은을 말하다]<11> 북한 1967년 독자노선…그리고 최고지도자 김정일

김일성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제…마르크스주의 서적들 홀대

1972년 새 헌법 중국형 통치시스템 채택…김일성 국가주석으로

숙부 김영주마저 1974년 ‘주체사상 의구심’ 구실로 당에서 축출

영화·예술로 아버지를 기쁘게…1980년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고미요지 컷




◇ 북한, 유일사상 체계 확립과 독자노선으로


북한이 원조 사회주의 국가 중국과 소련(中蘇)을 비판하면서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토의·결정한 것은 1967년 6월 말이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4기 16차 총회(6월 28일~7월 3일)에서 김일성의 주체사상만이 지도사상이라는 체계를 만들기 시작한 것. 우선 마르크스주의를 다룬 서적은 도서관에만 놓이고 역사교과서는 김일성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김일성혁명사상과 교시가 영화와 서적으로 나왔다.

한국의 적화통일이야말로 유일사상 체계 확립으로 연결된다는 명분 탓이었을까. 유일사상 체계 확립과 병행해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 사건이 비무장지대 등에서 급증했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원산만 부근서 미군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대표적 사례. 북한의 대남 공세는 계속 확산돼 그해 11월 백명 가까운 무장게릴라가 동해안에서 상륙을 시도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1972년 2월 2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첫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저우언라이(周恩來)와 회담했다. 미·중 관계를 확 바꿔놓고 냉전시대에 전환점을 찍은 그 모습을 보고 김일성이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북한은 72년 1월 27일 새 헌법을 채택했다. 새 헌법의 가장 큰 특색은 소련형 통치 시스템에서 중국형으로의 변경. 당시 김일성의 직책은 수상이었지만 중국식 ‘국가주석’으로 바뀌고 소련식 ‘마르크스주의’ 간판을 내리는 대신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했다. 또 형식적 집단지도체제로부터 독재체제로 완전히 이행해 ‘(김일성에 의한) 유일 지도체제’가 강조됐다.

소비에트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도카첸코는 NHK특집 프로그램에서 “북한은 우리를 시험해왔다. 그들은 주체사상을 가르치며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때때로 이런 사람들과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 건국을 도와주었지만 생각지 못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불쾌감이 스며 있다.

◇ 장남 정일의 협력

김정일이 김일성의 장남으로 태어난 때가 1942년 2월 16일. 그가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승계 받았을까? 그런 추론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김일성의 권력기반 굳히기 작업에 참가해 아버지의 신뢰를 얻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장남이라는 절대적 이점을 기반으로 김정일의 집요함이 더해진 결과물이라 하겠다.

김정일은 어려서 투병하던 모친을 잃고 누이와 함께 애정 결핍 속에 자랐다. 그는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예술적인 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의 경제학부를 졸업해 노동당에서 일했던 그가 1973년 9월 노동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서기로 선출돼 74년 2월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나중에 정치국으로 개명) 위원이 됐다.

인터넷용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평양 대동강변의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경기장 옆에 자리한 개선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평양 대동강변의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경기장 옆에 자리한 개선문.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김일성을 만족시킨 김정일의 예술활동


선전선동부로 자리를 옮긴 김정일이 선전영화와 연극·소설 등을 구사해 김일성 예찬운동을 펼치고 주체사상을 조선노동당 유일사상으로 법제화했다. 그는 1970년대 들어 황장엽 등을 동원해 ‘주체사상의 철학화’를 진행하고 그 성과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해 ‘사상·이론가’ 직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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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이런 공적에 힘입어 1973년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담당하는 서기로 선출됐고 74년 2월에는 노동당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김일성의 유일 후계자로 올라섰다. 그는 ‘당중앙’이라는 은어로 통했고 1980년 6차 대회에 공식 등장한 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불리게 된다.

독재자는 자기의 권위를 내외에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건물과 기념비를 만드는 일이 많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추앙하기 위해 평양 시내에 주체사상탑과 개선문을 만들었다. 주체사상탑은 북한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을 고안한 김일성의 업적을 기리는 높이 170m의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는 석탑. 평양을 관통하는 대동강의 언덕에 김일성의 70세 생일이던 1982년 4월 15일에 완공됐다.

주체사상탑보다 하루 먼저 테이프 커팅을 한 개선문(평양 모란봉구역)은 파리의 개선문을 방불케 한다. 이곳은 김일성이 처음 평양에 입성한 후 개선연설을 한 것을 기념한다는 명분이 붙었다. 파리보다 10m 더 높게 만들어져 1만개 이상의 화강암을 사용했고 폭 52.5m에 높이 60m로 세계 최대라고 알려져 있다.

◇ 김정일의 권력장악, 숙부를 밀어내다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에 사망하자 당서기였던 김정일이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부자세습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유례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세습결정까지 격렬한 권력투쟁이 있었다.

김일성은 한때 조직지도부장으로 당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김영주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당시 김영주는 황장엽 전 서기(1997년 한국으로 망명) 등에 의해 철학적으로 만들어진 ‘주체사상’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물론에서 일탈한 관념론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낚아챈 김정일의 보고가 김영주에 대한 김일성의 감정을 악화시켰다. 그리고 황장엽 등의 주체사상파를 동원해 ‘김영주 부수기’가 뒤따랐다. 김영주는 1974년 2월 당 회의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아 양강도의 산속으로 추방돼 20년 가까이 연금 상태로 내몰렸다. 김영주의 이름은 1975년 7월을 마지막으로 공식보도에서 사라졌다.

김영주의 동정이 다시 보도된 것은 1993년 7월. 그는 그해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국가부주석이라는 명예직에 올랐지만 권력의 중추로부터 이미 멀어진 뒤였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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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새해를 맞아 평창동계올림픽(2월9일 개막)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일촉즉발의 험악한 형국과 비교하면 상당한 진전이지만 상황 전개는 변수가 많아 여전히 지켜봐야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의 김정은 당위원장과 주고받은 말폭탄과 위협은 당장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섬뜩한 벼랑 끝 대치, 그 자체였다.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애꿎게도 우리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위기감에 시달려야 했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 61세.

고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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