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30년 전 남극에서 시작한 소리 없는 전쟁이 30돌을 맞았다. 서울에서 1만7,240㎞ 떨어진 남극반도의 끝자락 킹조지섬에 위치한 세종과학기지가 그동안 세운 공은 혁혁했다. 23일(현지시간) 서울경제신문이 찾은 세종기지도 남반구의 여름을 겪으며 겨우내 쌓인 하얀 옷을 벗고 활기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날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이 남극세종과학기지 생활관 앞에서 삽을 들고 섰다. 이곳은 1988년 이후 지난 30년간 남극을 거쳐 간 연구대원들이 먹고 자던, 세종기지의 살아 있는 역사 앞이다. 그의 다른 한 손에는 지름 약 30㎝의 원통이 들려 있었다. 이 원통에는 그간 세종기지의 연구성과가 기록된 책자, 그리고 이곳을 지나쳐간 연구원의 활동이 담겨 있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이 담겼다. 준공 30주년을 기념하는 이 타임캡슐은 준공 100년인 오는 2088년 개봉을 약속하며 그렇게 딱딱히 언 동토의 흙으로 덮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남극에 축전을 보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영상 메시지를 통해 “미래 청정자원인 가스하이드레이트를 발견한 성과는 국제사회에서도 인정하는 쾌거”라며 “세종기지 준공 30주년을 계기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세종기지의 이름 그대로 대한민국은 물론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남극세종과학기지=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
청정에너지 ‘가스하이드레이트’ 매장지 세계 첫 발견
경제 가치 무궁무진...과학적 성과로 자원 나눠가져
김영춘 장관 “제2 첨단 쇄빙선 등 극지연구 적극 지원”
23일 준공 30주년 기념행사를 맞아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은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미래 한국의 경제영토가 될 남극에서 전 세계 과학연구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고 결의에 찬 선언을 내뱉었다. 그는 “제2의 첨단 쇄빙연구선 건조 등 정책적 지원으로 우리 과학자들이 남극과 북극에서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남극정책의 비전도 내놓았다.
남극 과학기지에 현직 장관이 방문한 것은 기지 준공 당시인 1988년 박긍식 과학기술처 장관 이후 처음이다. 이날 기념식에는 김 장관을 비롯해 설훈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장, 심재권 외교통일위원장, 홍영표 환경노동위원장, 윤호일 극지연구소장 등이 참석했다.
남극은 미래의 경제영토로 불린다. 자원의 보고인데다 주인이 없는 땅인 만큼 경제적 가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성과가 2003년 세종기지에서 나왔다. 세계 최초로 미래 청정에너지인 ‘가스하이드레이트’ 대량 매장 지역을 발견한 것이다. 가스하이드레이트는 물 분자 내에 가스(주로 메탄) 분자가 들어가서 만들어진 얼음 형태의 물질로 겉모양은 얼음과 같지만 불을 붙이면 메탄이 타면서 강한 불꽃을 만들어 ‘불타는 얼음’으로 불린다. 이곳에 매장된 천연가스량은 우리나라의 연간 소비량인 3,000만톤의 200배에 달한다. 1993년부터 시작한 남극 해저지질 조사가 낳은 열매였다.
또 극지 연구를 통해 기존 물질보다 항산화 활성 능력이 뛰어난 노화방지 물질 ‘라말린’을 발견해 이를 활용한 화장품이 개발·판매되기도 했다. 라말린은 비타민C보다 50배 이상의 항산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항산화 물질뿐만 아니라 호냉성 효모와 빙하 속 미생물에서 얼지 않는 단백질도 발견했다.
하지만 남극은 현재 남극조약에 따라 2048년까지 과학적 목적 이외에 자원개발 등 경제적·군사적 활동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장관이 남극을 ‘미래 경제영토’라고 강조하며 강력한 육성 의지를 내비치는 것은 대부분 선진국이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훗날 남극의 파이를 나눠 가져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윤 극지연구소장은 “선진국들이 앞다퉈 남극에 기지를 세우고 연구활동에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며 “이유는 훗날 인류가 남극의 자원에 기댈 수밖에 없을 때 과학활동 순위가 자원개발과 영토를 나눠 갖는 순위로 평행이동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남극 진출은 선진국보다 늦은 편이다. 우리나라 국립수산진흥원이 40년 전인 1978년 남빙양(남극해)에서 크릴 시험 어획과 해양조사를 하면서 남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85년에는 한국해양소년단이 최초로 남극 관측탐험에 성공했고 남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1986년 33번째 국가로 ‘남극조약’에 가입했다. 이후 1988년 2월17일 한국의 최초 남극기지인 세종기지를 건설하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종기지와 2014년 설립한 장보고과학기지까지 총 2개의 상주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건립 초기 13명의 적은 인원으로 개소했던 세종기지는 30년간 월동연구대원 450여명과 3,000여명의 연구자들이 거쳐가면서 남극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남극 진출 후발 주자에서 30년 만에 세계 10위권 연구 국가로 올라선 것이다.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과 남극 반도 해역은 지난 수십년간 온난화로 인한 해빙 등이 급속히 진행돼온 지역으로 기후변화 예측을 위한 중요 거점 역할도 하고 있다. 세종기지는 세계기상기구(WMO)의 정규 기상관측소로 지정돼 하루 4회의 기상정보(기온·풍속 등)를 제공함으로써 세계 기상예보에도 기여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등 기후변화 지표를 관측하는 지구대기감시 관측소로도 지정됐다.
해수부도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에도 극지 연구 경쟁력 확보에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우선 지난해 4월 수립한 ‘제3차 남극연구활동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제2의 쇄빙연구선 건조를 추진할 예정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빙저호 탐사에도 착수한다. 빙저호는 빙하 하단이 녹아 형성된 호수로 새로운 생명체를 탐색할 수 있는 미개척 연구지역으로 꼽힌다.
해수부는 남극 연안을 벗어나 남극 대륙 더 깊숙한 곳으로 진출하기 위해 장보고기지를 기점으로 남극점에 이르는 독자적 내륙 진출로인 ‘코리안루트(K루트)’도 개발할 계획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세종기지·장보고기지에 이은 제3기지가 건설된다.
한편 김 장관은 이날 기념식에서 최초로 세종과학기지 월동대장을 지낸 장순근 연구원 등 지난 30년간 극지 연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표창을 수여했다. /남극세종과학기지=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