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안희정을 욕해야 하는 이유

송영규 논설위원

왜곡된 사회와 비겁한 개인은

한국판 미투 키운 불의의 자양분

미래 더 큰 불행 막으려면

스스로에게 채찍 들어야

얼마 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추문으로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을 때 아내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왜 남자들은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여자로만 보려고 하지요?” 뜨끔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했을 텐데 이번만큼은 아무 말도 못했다. 돌이켜보건대 나 자신도 선배든 후배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여성을 보면 성적 매력이나 외모부터 따졌다. 능력이나 성격은 그다음이었다. 그 뒤에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닌데 어때’ ‘남자는 본능의 동물이니까’ 하는 자기 합리화가 이어졌다. 입으로는 양성평등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남과 다를 바 없는 그렇고 그런 수컷이다.

생각 같아서는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어쩌라는 말이냐며 항변하려고 했다. 물론 틀리지 않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정의롭다고 세뇌받다 보니 출세를 하고 이름을 얻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줄 알았다. 비정규직과 저소득층은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죄의 대가이고 청년 실업은 중소기업에서 열심히 일할 생각 없이 잘나가는 대기업만 바라보는 삐뚤어진 인식 때문으로 취급했다.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가 특수학교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눈물로 호소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집 값 떨어지는 꼴을 볼 수 없다는 이기심으로 짓눌러 버렸다.


버림과 외면, 억누름 속에서 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앉았던 차별과 억압, 왜곡된 자본의 논리 속에서 그렇게 나를 길들여왔다. 약자는 외면되고 강자만 바라보는, 그래서 남이야 불행해지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되는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성폭력은 그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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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에 보이는 차별과 억압의 구조만 없앤다고 ‘미투’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그럴 리 없다. 안 전 지사는 얼마 전 검찰에 출두하면서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소인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물론 재판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겠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자신이 피해자들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누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도 된다.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도 그것이 잘못됐음을 알지 못한다는 솔직함이 섬뜩하지만 그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는다. 그것을 욕하는 순간 자기 자신도 해당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채 외면하고 덮어둔다. 나 자신이 그랬다.

무의식의 폭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대형 참사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일상화된 부패의 산물이었듯이 내가 가진 무감각 역시 자신도 모르게 쌓아온 부정의와 비겁함의 표출이다. 사회 구조만 탓하는 것은 이를 감추려는 나약함의 발로일 뿐이다.

얼마 전 제주도의 한 소규모 책방에서 우연히 방송작가의 경험담을 담은 독립출판물을 본 적이 있다. 무심히 책장을 넘기던 손이 어느 순간 딱 멈췄다. ‘나는 연예인과 ‘함께’ 일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연예인을 ‘위해’ 일을 할 뿐이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연예인뿐이겠는가. 멀리 찾지 말자. 조직을 위해, 이념을 위해, 나라를 위해라는 달콤한 꼬임 속에 내가 가진 기득권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비겁함과 옹졸함이 미투를 부르는 불의의 자양분인 것을 나는 안다.

작가 김훈은 에세이 ‘라면을 끓이며’에서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통의 맨살, 죄업의 뿌리와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의 뉘우침은 진정성과 눈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미투를 대하는 자세도 이와 달라서는 안 된다. 사회 곳곳에 박혀 있는 차별과 억압, 부조리와 낡은 관행을 없애고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비겁함에 스스로 대항할 수 있을 때까지 나가야 한다. 이렇게 못한다면 그 대가는 미래의 내가, 혹은 우리의 아들들이 혹독하게 치를 것이다. 더 큰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부패한 권력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안희정에게 손가락질하며 스스로 채찍질한다.
skong@sedaily.com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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