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기업의 기밀정보 공개와 관련한 정부 방침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가뜩이나 반도체 공정 관련 정보가 담긴 삼성전자 작업환경 보고서의 외부공개 논란으로 시끄러운 차에 화학업종에 대해서도 정보 공개 확대를 추진하고 있어서다. 특히 이런 일련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기업의 목소리가 아예 배제되고 있다는 불만이 강하다.
당장 기업이 제조 혹은 수입하는 화학물질의 정보를 공개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12일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통해 화학물질 제조·수입자는 제품명, 구성물질명, 함유량, 유해·위험정보 등을 기재한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고용부 장관에게 의무 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기업이 양수인에게 MSDS를 건넬 때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물질명과 함유량을 비공개한 상태에서 제공했다. 하지만 개정안이 시행되면 기업은 ‘영업비밀’을 포함한 모든 화학물질 정보를 정부에 넘겨야 한다. 고용부는 이 정보를 손에 쥐고 자체적으로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정보와 아닌 정보를 심사한다. 한 화학업체 관계자는 “거래 상대방에게 제공되지 않던 기업의 영업비밀을 정부가 일단 모두 받아 보관하겠다는 것 아니냐”며 “그 과정에서 영업비밀이 새나갈 수 있는데다 정책 취지가 가급적 정보를 공개하겠다는 쪽이라 기밀정보 판단 기준이 느슨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또 영업비밀로 승인을 받아도 유해성·위험성을 유추할 수 있는 수준의 대체명칭과 대체함유량을 공개하기로 했다. 영업비밀로 인정돼도 3년마다 공개 여부를 재심사할 방침이다. 기업들은 심사 등 일련의 과정에서 정보가 유출될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가령 PET를 기초재료로 사용하는 화학제품에 몇 가지 가소제를 섞어 만드는 화학제품의 경우 가소제로 쓰이는 대략적인 원료명만 유출돼도 해당 기업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한 화섬업체 관계자는 “일반적인 기업이 생산하는 범용제품은 문제가 안 되지만 해당 기업만 만드는 제품 원료나 함유량이 노출되면 경쟁기업이 관련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이런 우려에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공무상 비밀유지 의무 대상을 넓히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영업비밀은 대체명칭을 통해 보호할 것”이라며 “정부에서의 유출을 의심한다면 정부마저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 아니냐”고 말했다.
정보 공개와 관련한 갈등은 우리 경제의 버팀목 격인 반도체 분야가 더 심각하다. 삼성은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르면 13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정보공개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결정이 난다. 받아들여지면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보고서 공개를 피하지만 반대면 나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이 경우 행정심판을 진행 중인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오는 17일 있을 집행정지 결정에 의존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집행정지 결정을 못 받으면 4월19일(고용부가 정보 공개 판정을 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에 보고서를 까야 한다. 이번 주, 늦어도 다음 주가 분수령인 셈이다. 그나마 산업통상자원부의 국가핵심기술 판정(16일)이 고용부의 정보 공개 여부 최종 결정에서 우군이 돼줄 것으로 기대하는 정도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내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정부가 ‘사람 목숨이 중요하다’는 흑백논리 프레임으로 정보 공개 이슈를 몰아가고 있다고 반발한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이미 산업재해 피해자가 원할 경우 (보고서 등) 자료 열람이 100% 가능한데 이 사안과 아무 관련이 없는 외부에 반도체 기밀정보를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이번 논란은 한 방송사가 노동지청에 삼성의 작업환경측정 보고서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고 고용부가 공익 목적이라면 제3자 공개가 가능하다고 수용해 촉발됐다. 특히 정보요청 범위도 산재 피해자가 대전지방법원에 관련 소송을 제기했던 해당 공장인 온양뿐 아니라 기흥·화성·평택공장 등이 총망라돼 있다. 모두 반도체 핵심공정을 맡은 곳이다. 삼성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삼성의 한 고위관계자는 “보고서에는 라인 공정 배치도, 화학물질 상품명 등 핵심정보가 담겨 있다”며 “이 정보가 나가는 순간 20~30년 걸려 쌓아온 10나노 D램, 3D 낸드 등 라인 배치 운영 노하우가 유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임원은 “노조 친화적 정부가 기업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있다”며 “이런 식이라면 사고 한 번 나면 공장을 다 보여줄 판인데 기업 입장에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상훈·박성호·진동영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