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A은행의 1년 단위 사업을 수주하고 직원을 파견한 중견 시스템통합(SI)업체 B사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직원 수가 300명이 넘는 B사는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오는 7월부터 주당 노동시간이 52시간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A은행은 노동시간 제한 적용을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은행에 파견된 B사 직원들은 은행 업무시간에 맞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장에 나가 근무했다. 그러나 하반기부터 지금과 같이 일한다면 B사는 경우에 따라 근무시간 외 일을 시키는 ‘불법 기업’이 된다. 그렇다고 단축 노동시간을 지키며 현재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려면, 인건비 부담이 최대 50% 이상 늘게 된다. B사 관계자는 “불법 업체로 전락하거나 사업을 수주하고도 손해를 보거나 둘 중 하나”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22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중견 SI업체 상당수가 하반기부터 불법 업체가 되거나 기존 사업 수행을 위해서는 추가 고용에 따른 비용을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합의된 노동시간 단축안으로 인한 사각지대 때문이다. 300인 이상 SI업체들은 당장 7월부터 노동시간 단축이 적용되지만, 직원들이 주로 파견돼 근무하는 의료기관과 금융권은 노동시간 단축 대상이 아니다. 의료기관은 특례업종에 포함됐고, 금융권은 1년 유예를 받아 내년 7월부터 적용된다.
SI업체는 보통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한다. 따라서 지난해 하반기나 올 상반기에 시작한 사업에 파견된 SI업체 직원들은 기존 관행대로 근무하면 앞으로 ‘불법 영업’을 하게 된다. IT업계 관계자는 “은행이나 의료기관에 서비스에 장애가 발생하면 SI업체는 밤낮은 물론 휴일도 없이 현장에 나가 복구해야 한다”며 “발주업체가 ‘갑’인 상황에서 즉각 복구 조치를 못하면 향후 수주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계약에 따라 페널티 금액을 지불하거나, 계약 불이행으로 소송까지 당할 수도 있다”고 난감해했다.
결국 SI업체가 법 개정안을 따르면서 기존 서비스를 유지하려면 추가 고용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관행상 이 비용도 SI업체가 모두 떠안을 수 밖에 없다. 의료·금융계는 SI 인건비 계산방식에 ‘헤드카운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 방식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가 매년 발표하는 소프트웨어(SW) 기술자 노임 단가에 따라 인건비를 계산해 발주금액을 산정한다. 노임 단가에는 법인 부담금이나 수당까지 모두 포함된다. 일단 계약을 맺으면 발주업체가 근무시간을 결정하지만, 파견 직원의 수당은 전적으로 SI업체가 책임진다.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는 지난달 고용노동부에 ‘IT서비스 산업’을 노동시간 단축 적용 특례업종으로 지정해달라는 안을 검토했지만 결국 철회했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것으로 비쳐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대신 협회는 정부 각 소관 부처에 선택근무제와 탄력근무제의 산정기간을 1년으로 늘리고, 헤드카운팅 관행을 폐지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정부의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SI업체가 추가로 부담할 비용을 보전해주거나 정부가 나서서 발주업체와의 계약 내용을 조정해달라고도 요구했다.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 관계자는 “단순히 노동시간만 줄일 게 아니라 발주업체의 일방적 요구에 따른 파견직원의 과도한 연장근무나 연차 사용 박탈 등 시대에 뒤떨어진 노동 환경도 함께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