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덴마크의 바이오제약 업체 노보자임스에 근무하는 줄리아 베딩필드씨는 3년 전 딸을 낳기 전에는 오후6시30분이 돼야 퇴근했다. 하지만 딸을 낳은 후 베딩필드씨의 퇴근 시간은 달라졌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거나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하는 등 사정이 생기면 그가 필요한 시간에 회사 정문을 나섰다. 부서팀장을 비롯해 팀원 누구도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급한 일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뒤 밤에 집에서 보충한다. 자택근무 시간도 업무 시간으로 인정해 회사 규정상 일주일 단위의 정해진 업무 시간을 채우는 것으로 간주된다. 베딩필드씨는 “솔직히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회사에서 유연근무제를 제공하니 그만둘 필요가 없었다”며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는 게 워킹맘들에게 가장 중요한데 회사가 잘 도와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 핀란드의 정보기술(IT) 전문업체 티에토에서 일하고 있는 헬레나 반씨는 최근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했지만 두 아이를 챙기는 부담은 크지 않다. 반씨의 육아휴직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남편인 미카씨가 약 2개월간 육아휴직을 냈기 때문이다. 반씨는 출근길에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퇴근길에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귀가한다. 회사의 유연근무제 덕에 출근 시간은 8시에서 10시 사이로 자유롭다. 낮 시간에 남편이 둘째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반씨는 “어린이집이 잘 갖춰져 있고 출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어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며 “남편의 육아휴직으로 남편과의 육아 분담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구의 복지국가에서 경력단절여성이 우리처럼 많지 않은 것은 유연근무제 덕분이다. 상당수 회사들은 직원들, 특히 워킹맘들에게 퇴근 시간의 자유를 제공한다. 성과평가는 실적과 업무 결과로 이뤄질 뿐 근로 시간과 근무 태도가 좌우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덴마크의 대다수 회사들은 업무 시간을 엄수하도록 요구했고 워킹맘들도 오후5시는 돼야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여성들의 직업 쏠림은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여성들이 유연근무가 가능하거나 근로 시간이 적은 공무원과 의료복지(헬스케어) 쪽으로 몰려들었고 남성 직원은 금융업·IT산업 분야로 대거 쏠렸다. 상대적으로 보수가 더 많은 금융업과 IT 산업에 남성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면서 남녀 간 임금격차는 더 벌어졌다. 세실 키슬링 덴마크 고용부 워킹라이프센터 선임자문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덴마크 여성들이 고용시장으로 급격하게 유입됐고 2010년대에는 여성 고용률이 75%까지 늘어 남성(81%)과 격차가 많이 줄었다”며 “하지만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급여 수준이 낮은 의료복지, 공공 부문 등으로 쏠렸고 남성은 급여 수준이 높은 사기업으로 몰려 남녀 간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덴마크 정부는 우선 워킹맘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 번째가 어린이집·유치원 등 보육시설 확충이다. 생후 6개월부터 보육시설에 아기를 맡길 수 있게 해 맞벌이 여성들의 특정 산업군 쏠림현상을 완화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회사들의 유연근무도 정착시켰다. 그 결과 여성의 과학·공학 분야 진출이 늘었고 임금격차도 다소 해소됐다. 덴마크 통계은행에 따르면 남성 근로자가 여성보다 많은 과학과 공학전문직·건설업·제조업 등에서 지난 5년간 임금격차가 완화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과학과 공학전문직은 지난 2011년 남녀 간 시간당 임금격차가 70.06크로네(약 1만2,093원)가량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2016년에는 62.21크로네(약 1만738원)로 7.85크로네(1,355원)가량 줄었다. 또 건설업은 5년간 남녀의 시간당 임금격차가 12.42크로네(2,144원)에서 7.49크로네(1,293원)로, 제조업은 18.41크로네(3,178원)에서 10.98크로네(1,895원)로 각각 줄었다. 힐다 뢰머 크리스텐슨 코펜하겐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덴마크에서도 여성은 육아를 위해 근무 시간을 줄이는 경향이 뚜렷한데 과거에는 이로 인해 여성이 비정규직(파트타임) 직업군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분명했지만 현재는 경력단절 발생이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정부도 기업 내 유연근무제 문화 정착과 함께 공공 어린이집 시스템인 데이케어센터 구축을 통해 맞벌이 부부의 육아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만 3세 이하의 아이를 가진 부모가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게 보장하는 ‘유연 및 부분 육아 허가제’를 시행했고 이는 핀란드 부모의 일·가정 양립을 가능하게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지난해 회원국의 일·가정양립지수에 따르면 핀란드는 10점 만점에 8.1점으로, 워라밸(일과 가정의 균형)이 잘 유지되고 있는 국가인 것으로 나타났다. 타냐 오비넨 핀란드 사회복지부 성평등파트장은 “아빠와 엄마 모두는 일과 가정에 함께 참여해야 하고 같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다”며 “유연근무제나 데이케어센터 등 맞벌이 부부가 육아에 동참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은 핀란드 여성의 경제참여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핀란드 통계청에 따르면 경제활동이 가능한 15~64세 여성 가운데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의 비중은 1993년 59%에서 지난해 69.6%까지 올랐다. 리나 린나인마 핀란드상공회의소 부총재는 “더 많은 여성이 일해야 하는 것은 고령화 시대에 노동생산인구가 충분하지 않으면 연금뿐만 아니라 의료 및 사회 복지를 지원할 기금도 부족해져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와 국민이 심각한 문제에 처하기 때문”이라며 “이른 시일 내에 여성의 노동참여율을 75%까지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펜하겐=강동효기자 헬싱키=이지윤기자 kdhyo@sedaily.com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