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당하는 순간이 담긴 녹음을 들은 미국 정보요원들이 이 녹음이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카슈끄지 피살에 연루돼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피살 배후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는데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진상조사가 나온 후에야 행동하겠다는 ‘매우 신중한’ 기조를 굳건히 고수하는 양상이다. 이런 와중에 사우디 왕실이 미국과 원유 감산, 예멘 내전 해결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노출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볼턴 보좌관은 13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자신은 녹음을 직접 듣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든 왕세자와 그의 살해를 연결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을 들은 이들의 평가”라고 말했다고 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진상을 알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그의 발언이 무함마드 왕세자가 카슈끄지 피살 배후라고 말하기를 자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를 반영한다고 해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사우디 정부가 이번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대응방법에 대해 의회와 협의하고 있고, “내주에 그 사안에 관해 나는 훨씬 강한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내게 훨씬 강한 견해가 형성되고 있다”고만 답했다.
앞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 10일 TV 연설 도중 ‘카슈끄지 녹음’을 사우디,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에 제공했다면서 “이들 각국이 살인 현장에서 벌어진 대화를 다 들어서 안다”고 했다. 그는 12일 저녁 귀국길 비행기에서도 기자들에게 “그 녹음 내용은 정말 끔찍하다. 사실. 사우디 정보요원은 그것을 듣고 충격을 받아 ‘마약을 먹은 자만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에르도안은 사우디 왕실이 카슈끄지 살해에 연루된 게 확실하다면서도 자신이 “무한히 존중하는” 살만 사우디 국왕이 배후에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누가 그들에게 살해 명령을 내렸는지가 드러나야 한다”며 무함마드 왕세자를 겨냥한 압박을 보탰다.
이 같은 에르도안의 언급은 피살 당시 녹음에 무함마드 왕세자가 살해 배후임을 암시하는 대화가 담겼다는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보도가 있고 난 뒤 나왔다. NYT는 녹음 내용을 잘 아는 3명을 인용, 지난달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총영사관에서 카슈끄지가 살해된 직후 암살조의 일원이 전화로 상관에게 임무 수행 사실을 알리면서 “당신의 보스에게 말하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보스’가 누구인지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미 정보 관료들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가리킨 것으로 믿는다고 NYT는 전했다.
문제의 전화를 한 인물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자주 수행하는 경호원인 마헤르 압둘 아지즈 무트레브라고 소식통은 설명했다. 지금까지 사우디 정부는 카슈끄지가 사우디 요원들에 의해 사우디총영사관에서 살해된 사실은 시인했지만, 지시를 내린 ‘윗선’에 관해서는 함구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 왕실과 카슈끄지 살해 연관성에 관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는 와중에 사우디와 미국 사이에 갈등이 부상하고 있다. 칼리드 알팔리 사우디 산업에너지 광물부 장관은 지난 11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10개 비회원 주요 산유권의 장관급 공동점검위원회(JMMC)에서 사우디는 내달부터 하루에 50만 배럴의 원유를 감산하겠다고 밝히고 “더 많은 원유 감산엔 아직 산유국들이 합의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사우디와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 생산을 줄이지 않을 것이다. 유가는 공급을 기반으로 훨씬 더 낮아져야 한다”고 분명한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또 미 정부가 사우디 주도 아랍 동맹군이 내전에 개입한 예멘에서 휴전을 압박하는 가운데 사우디가 예멘 반군의 거점인 항구도시 호데이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미국은 아랍 동맹군 전투기에 대한 공중 재급유를 중단하는 조처를 내렸다. WP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미국 측의 공중 재급유 중단이 사우디의 공습 임무 수행능력을 제한할 것이라고 전했다.
/권혁준인턴기자 hj7790@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