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조상인의 예(藝)]형용할 길 없는 桃紅...무병장수의 신령한 기운 담겨

<94>해반도도(海蟠桃圖)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숨어있던 걸작

2013년 도교기획전 준비하다 극적 발견

묵은 때 벗기니 싱그러운 빛깔 고스란히

한입 베어물면 천년 살게 한다는 복숭아

암석 뚫고 나온 뿌리 곁에는 영지와 天竹

전시실 찾으면 새해 '萬福의 축복' 가득

‘해반도도(海蟠桃圖), ’신선세계의 복숭아‘를 그린 것으로 앞면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로 제작돼 왕실용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 213.5x151.5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해반도도(海蟠桃圖), ’신선세계의 복숭아‘를 그린 것으로 앞면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로 제작돼 왕실용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 213.5x151.5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행복과 축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고개 내밀고 방긋 웃음 짓곤 한다. 수장고에 둘둘 말려 있던 것을 먼지 털어 펼쳤더니 왕실의 위엄과 무병장수를 기원한, 그것도 양면에 ‘해반도도(海蟠桃圖)’와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동시에 지닌 이 귀한 유물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이 ‘덕수2153’이라는 소장품 번호로 갖고 있던 19세기 조선의 ‘해반도도’와 ‘일월오봉도’는 지난 2013년 도교를 주제로 한 최초의 대규모 기획전인 ‘한국의 도교 문화’를 준비하면서 극적으로 발견됐다. 1909년 이왕가박물관에서 인계받은 유물이었는데 출처와 용도는 잊힌 채 1969년까지만 해도 문화재관리국이 덕수궁미술관 ‘일본미술품실’에 보관했던 터였다. 주목받던 그림은 아니었으나 성인 키를 훌쩍 넘는 2m짜리는 웬만한 여염집에는 엄두도 못 낼 크기였으니 필시 궁궐에서 사용되거나 왕실 행사를 위한 그림임이 분명했다.

묵은 때 벗기고 다시 장황(粧潢·표구) 하니 그제서야 말갛고 싱그러운 복숭아들이 알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분홍도 빨강도 아닌 이런 색은 복숭아 빛 도홍색(桃紅色)이라는 말 외에는 형용할 길이 없다. 뾰족한 복숭아는 여인의 젖가슴처럼 붉은 자태를 뽐내고, 통통한 열매 아랫부분은 갓난 아이의 살오른 엉덩이처럼 탐스럽다. 큼지막한 열매가 모두 열 네 개다. 과일 표면에 이슬 맺히듯, 연지 같은 붉은 점이 복숭아 볼에 찍혀있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줄줄 흐를 정도로 농익었음을 의미하는 ‘점’이다. 실력 뛰어난 궁중 화원이 그린 공필진채화(工筆眞彩畵)라 묘사는 정교하고 섬세하며 색채는 선명하고 강렬하다. 복사꽃잎은 비단결처럼 곱고 화사하다. 나뭇잎은 담록, 초록, 진록을 번갈아 색칠해 입체감과 생동감을 더했다. 오른쪽 바위 위에 뿌리내린 복숭아 가지는 사선으로 뻗어 바다 펼쳐진 화면 전체를 가르는데 옹이 지고 구불구불한 기세가 천 년 고목임이 틀림없다. 이 반도는 도교 최고의 여신이자, 동아시아에서는 그리스신화의 헤라 여신 버금가는 서왕모가 그 주인이다. 설화에 따르면 서왕모는 곤륜산에 살며, 바다처럼 드넓은 요지 연못 주변에 천도복숭아 나무를 심어 키운다고 했다. 이 신선의 복숭아 나무줄기가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서려 있는 반룡(蟠龍) 같다 하여 ‘반도(蟠桃) 복숭아’라 불린다. 반도 나무는 3,000년에 한 번 꽃 피우고 열매 맺는데 신선들만 먹는 그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도 “바다 가운데 도산산이 있고 그 산 위에 구불구불 3,000리나 뻗은 큰 복숭아나무가 있다”고 적혀 전한다.

‘해반도도’의 앞면인 ‘일월오봉도’는 문헌을 근거로 창경궁에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해반도도’의 앞면인 ‘일월오봉도’는 문헌을 근거로 창경궁에 설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신령한 반도뿐인가. 얼룩얼룩 푸른 이끼 낀 암석을 뚫고 나온 반도 나무 뿌리 곁에는 영지(靈芝)와 천죽(天竹)이 자라고 있다. 신선들이 먹는다는 영지의 다른 이름은 ‘불로초’다. 천죽은 신선의 대나무라 불린다. 후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전하는 비장방(費長房)이 신선술을 배운 뒤 죽장(竹杖)을 타고 날아 집에 도착했고, 그 지팡이를 호수에 던졌더니 청룡으로 변해 구름 위로 사라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런 천죽, 즉 푸른 대나무가 집 주변에 자라나면 재물이 불어난다고 하더라. 신령한 나무 중간에 드리운 옅은 구름에서도 영험한 기운이 감돈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뉜 파도도 경사스러운 일을 기다리는 듯 춤춘다. 종이 뒷면에서 푸른색을 칠해 앞에서는 은은하게 배어난 고상한 푸른빛을 볼 수 있게 했고 먹으로 물결의 윤곽을 그려 잔잔한 느낌을 전한다. 바위 주변으로는 포말이 일어 물방울을 튀기는데 “행복이여, 오라” 손짓하는 듯 경쾌하다.


2013년의 전시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된 이 그림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된 것인지를 연구한 이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의 문동수 학예연구사(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홍보과장·학예관)였다. 행적이 모호한 유물의 배경을 알기 위해 문 학예관은 왕실에서의 흔적을 찾아 각종 의궤를 뒤졌다. 그리하여 1834년에 제작된 ‘창경궁영건도감의궤’에서 임금이 일상적 업무공간으로 사용된 편전인 함인정(涵仁亭)에 ‘한 칸 거리의 오봉장지 한 쌍’을 제작한 기록을 찾아냈다. ‘오봉’이라 함은 이 ‘해반도도’의 앞면 그림에 해당하는 ‘일월오봉도’를 유추하게 했다. ‘장지’는 필요에 따라 벽과 대청 사이에 끼워 사용하는 벽 같은 문을 가리킨다. 마침 함인정 천장의 사방 벽에는 물·봉우리·달·소나무 등을 사계절에 빗대 노래한 도연명의 사시(四時)가 적혀 있으니 ‘해반도도’와 ‘일월오봉도’의 그림이 더해지면 성스러운 공간을 이루기 충분하다. 크기도 얼추 맞았다. 게다가 이 ‘해반도도’를 가리키는 유물번호 ‘덕수2153’에는 이 두 폭 외에 ‘해반도도’로 양면을 그리고 가운데 창호문 흔적 있는 그림 한 쌍이 더 포함돼 있다. 문 학예관은 “중앙의 기둥 간격이 340㎝인 함인정 내 기둥 사이에 문설주를 세우고 아래위 문지방 사이에 그림을 끼워 세웠다면 세로 210㎝, 가로 234㎝의 일월오봉도가 설치되기 적절한 공간이었을 것”이라며 “이런 방식의 설치는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보이는 그림설명과 일치했고 연결된 문설주 옆 기둥에 창호 달린 ‘해반도도’ 한 쌍의 장지가 ㄱ자구도로 배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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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20세기가 되면 서양에서 들어온 안료인 양록, 양청이 왕실그림과 민화에서 종종 사용됐지만 이 그림들에는 그런 재료가 전혀 섞이지 않고 천연의 석록, 석청이 사용됐기 때문에 제작 시기를 19세기 중반까지 상정할 수 있다. 보통 반도 복숭아를 그린 ‘반도도’는 십장생도의 일부로 등장하거나 해달, 학과 사슴 등과 함께 그려진 것이 많으나 이처럼 바다 위 절벽에 반도만이 주인공인 ‘해반도도’는 현존하는 그림 중 가장 시기가 이른, 유일한 작품이라 걸작으로 꼽힌다.

보물1442호로 지정된 ‘일월반도도병풍’ 중 해를 그린 쪽 그림.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보물1442호로 지정된 ‘일월반도도병풍’ 중 해를 그린 쪽 그림.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보물1442호로 지정된 ‘일월반도도병풍’ 중 달을 그린 쪽 그림.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보물1442호로 지정된 ‘일월반도도병풍’ 중 달을 그린 쪽 그림.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이와 유사한 구도의 그림으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이자 보물 제 1442호로 지정된 ‘일월반도도 병풍’이 있다. 각 4폭으로 구성된 2점 한 쌍의 대형 궁중 장식화 병풍이다. 파도 넘실대는 바다 위 절벽에서 자라난 복숭아 나무에 토실토실한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단순화해 그렸다. 1901년의 ‘영정모사도감의궤’에 따르면 1900년 화재로 잃어버린 경운궁의 선원정을 고쳐 짓고 그 내부 장식용으로 4폭짜리 해반도 병풍 2좌를 제작한 기록이 전하는데, 전문가들은 이 병풍일 것으로 추론한다. 의궤에는 병풍을 그린 화원 10명의 명단까지 적혀있다.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처럼 영원히 늘 그 자리를 지키며, 만물의 소생과 오행(五行)의 순환을 기원하는 물처럼, 가운데 솟은 굳건한 산봉우리 같은 왕이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려진 적 없는 조선 왕실 고유의 그림이다. 복숭아나무 위쪽으로 왕을 상징하는 붉은 해, 왕비를 뜻하는 흰 달이 각각 휘영청 떠올라 왕의 장수뿐만 아니라 왕실의 영원을 기원한다. 당시 제작된 이 일월반도도 병풍은 선원전을 수리하고 윗대 조선 임금 일곱 분의 영정(어진)을 봉안한 선원전을 지키며 세워졌다. 반도 복숭아와 청록색의 바위산, 넘실대는 물굽이, 억센 바위 등이 극채색 극세필로 그려져 있다. 동쪽인 오른쪽에 둔 붉은 해의 병풍과 왼쪽에 놓인 흰 달의 두 폭 병풍이 대칭을 이루는데, 그 소재와 상징성이나 기법이 탁월해 지난 2005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 같은 정황 등을 고려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월오봉도’와 ‘해반도도’도 보물급으로 보기 손색없다.

마침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는 새해를 맞아 축복을 기원하며 ‘영원한 행복을 꿈꾸며’라는 주제로 이들 ‘해반도도’를 전시 중이라 실물을 볼 절호의 기회다. 설령 찌들린 삶에 누추한 인생일지라도 이런 그림과 함께라면 단숨에 신선이 거처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끌어 올려질 것만 같다. 신선계의 하루는 현세의 수십년에 해당한다 하던데, 그림 보느라 하루가 다 갈지도 모른다. 한 입 베어 물면 천 년을 살게 하는 반도이니, 그림 한 폭에 새해 만복은 충만하지 싶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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