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직 민간단체 회장을 꿈꾸는 이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는 회원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평상시에도 꼼꼼하게 표밭을 다져놓아야 한다. 선거에 나갈까 말까 우물쭈물하다 막판에 출마 결심을 하고 선거운동에 들어가면 십중팔구 늦다. 단체 회원뿐 아니라 정·재계와 관계, 언론계와의 네트워크도 다져야 한다. 그래야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내가 가진 인맥을 바탕으로 업계의 애로사항을 풀겠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다 당선되는 것도 아니다. 무명의 다크호스가 바람을 일으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정치판의 선거와 똑같다.
그러면서도 사업은 사업대로 챙겨야 한다. 중소기업중앙회장을 꿈꾸는 사업가라면 자신의 사업이 튼튼해야만 업종별 조합 이사장이 될 수 있고 중기중앙회장 출마 자격을 얻는다. 자신의 사업이 잘돼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래야 단체의 회원과 잠재적 경쟁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업과 단체 활동 모두를 챙겨야 하는 삶은 금요일에 지역구에 내려가서 월요일 새벽에 서울로 돌아온다는 정치인들의 ‘금귀월래(金歸月來)’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중기중앙회장 레이스에 나선 후보들 역시 그렇게 바쁜 삶을 산 사람들이다. 기호1번 이재한 후보는 19대와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충북 보은·옥천·영동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기호2번 김기문 후보는 한국의 유력 인사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마당발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7년부터 8년간 중기중앙회장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업체인 제이에스티나의 사세 확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송혜교·김연아·소녀시대 등 빅 모델을 기용한 공격 마케팅을 주도했고 최근에는 삼성물산 패션 부문 출신의 거물급 디자이너 정구호씨를 영입해 업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중기중앙회장 후보 등록은 지난 7~8일이었지만 ‘누가 나온다더라’ 하는 얘기는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나왔다. 기호3번 주대철 후보는 이 과정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유권자들과 언론에 문자를 보내 “수개월 동안 상대 후보로부터 ‘광 팔러 나왔다’ ‘(바람만 잡다 결국) 후보 등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타도어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기호4번 이재광 후보에게 이번 도전은 ‘재수(再修)’다. 2015년 중기중앙회 선거에 출마해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고배를 마셨다. 두 번째 도전인 만큼 중기중앙회장의 역할과 중소기업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기호5번 원재희 후보는 중기중앙회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중소기업계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중기중앙회장 선거는 표심을 예측하기가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유권자가 국회의원인 정당의 원내대표 선거보다 표심 읽기가 더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왜 그럴까. 첫째는 유권자들 모두가 업종별 중소기업 협동조합 이사장과 협동조합 전국연합회장 등 각자 분야의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단히 노련해서 단순히 친하다고, 같은 업종에 있다고 표를 주지 않는다. 각자의 사업과 조합장 위치는 물론 미래의 야망까지 넣고 계산을 해본 뒤 누구에게 표를 줄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표심을 읽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유권자 모두가 사업가라는 점이다. 중기중앙회장 선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중기 대표는 “후보들이 표를 달라고 찾아오면 백이면 백 모두 줄 것처럼 대답한다”면서 “언젠가 그 후보와 사업적으로 엮일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속마음과는 달리 일단 좋게 대하는 게 사업가들의 기본 생리”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어떤 후보가 누구와 친하니 그 사람이 그 업종의 표를 몰아올 것이라는 등의 얘기는 다 쓸모없다”면서 “1차 투표의 1·2위가 붙는 결선투표 직전까지는 대세를 예측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는 3월13일에 열리는 지역 농협조합장 선거는 내년 농협중앙회장 선거의 전초전 성격이다. 조합장 서너 명 중 한 명은 회장 선출권이 있는 중앙회 대의원이 되기 때문이다. 농협조합장은 중앙회장이 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다.
조합장 출신들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시군의원 등에 도전하며 정치판에 뛰어들기도 한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잘 나와봐야 60%대지만 조합장 선거 투표율은 80%에 육박한다. 그래서 “시장이나 군수보다 조합장의 힘이 세다”는 말도 나온다. 조합원 수와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조합장의 평균 연봉은 1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직원 80여명의 인사권을 갖고 연간 10억원 안팎의 지도사업비로 조합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조합장 선거는 총선 못지않게 열기가 뜨겁다. 3억원을 쓰면 붙고 2억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3당2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15년 처음 열렸던 동시 조합장 선거에서 적발된 불법선거를 보면 과열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전북 부안의 한 출마자는 경쟁자에게 출마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2,700만여원을 건네 고발됐다. 경북 김천에서는 조합 이사와 감사 등 10명에게 해외여행을 보내준 출마자가 고발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상대 후보 차량에 위치추적기를 부착하고 흥신소를 동원해 미행한 사례가 적발됐다. 당시 불법선거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높아지자 선거 관리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했지만 과열된 선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조합장 선거를 앞두고도 출마자들의 금품 살포, 음식물 제공 등의 불법행위가 속출하고 있다. 광주 광산구 조합장 출마를 준비하던 한 후보자는 조합원 자택 등을 방문해 본인을 지지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조합원과 가족 등에게 현금 200만원을 제공한 혐의로 적발됐다. 경남선관위는 상품권 2,500만원어치를 구입해 이 중 80만원어치를 조합원 8명에게 제공한 혐의로 출마자이자 현 조합장인 A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 같은 위반사례는 설 이전까지 고발 26건, 경고 68건 등 총 95건에 이른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적발 건수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민간금융협회의 회장 선거판에서는 지난해 초 열린 제35대 신협중앙회장 선출 과정이 혼탁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7명의 후보 중 전현직 신협중앙회장이 서로 배임과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을 하며 진흙탕 싸움이 됐다. 신협중앙회 대표감사인 이희찬 후보가 현직 중앙회장인 문철상 후보와 신협중앙회 이사인 김윤식 후보 간에 금품이 오갔다며 검찰에 고발했고 전임 회장인 장태종 후보는 과거 선거 과정에서의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회장 선거가 이처럼 치열해진 것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잔뼈 굵은 신협 인사들이 선거에 뛰어들며 힘겨루기를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각종 논란 끝에 김윤식 후보가 회장으로 선출됐지만 회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보다 혼탁 선거 과정에서 어수선해진 중앙회 조직을 추스르는 일에 더 집중해야 했다.
/맹준호·박형윤·손구민기자 next@sedaily.com